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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개미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광란의 오를란도 241012

willow77 2024. 10. 19. 23:52

 

 
10월 12일 서울에서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내한 공연이 열리던 날 대구에서는 푸치니의 나라 이탈리아 페라라 시립극장(Teatro Comunale di Ferrara)에서 내한한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 공연이 열렸다. 현지 연출과 대부분의 캐스트를 그대로 가져와 올린 덕분에 국내에선 볼 수 없는 최고의 바로크 오페라 공연을 경험할 수 있었다. 대구오페라축제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올해는 어떤 작품을 올릴지 기대가 컸는데, 처음 공지할 땐 헨델이 태어난 독일 할레에서 열리는 헨델 페스티벌 프로덕션의 <오를란도>로 계획돼 있었다. 티켓팅 일정을 발표하면서 갑자기 2022년 <돈 조반니>로 내한했던 페라라 극장의 <광란의 오를란도>로 바뀌었는데, 현지 사정으로 취소돼 급하게 페라라에 SOS를 청한 것인지 뭔지, 암튼 바뀌었음. 두 작품 모두 레어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비발디 <광란의 오를란도>의 경우 영상물로 발매된 것이 꼴랑 3편뿐일 만큼 유럽에서도 잘 공연되지 않고 이번 공연이 한국 초연이자 아시아 초연일 정도로 정말 정말 잘 안 올리는 작품이다. 페라라 극장이 작년에 <광란의 오를란도>를 올린 이유도 작품의 원작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의 소설이 페라라에서 쓰였기 때문인데 대구에서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개레어한 작품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맨날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오페라만 왕왕 열리던 국내에선 볼 수 없었던 정말 귀하디귀한 작품이었다. 근데 웃긴 건 2017년에 국립오페라단이 레퍼토리 발굴 명목으로 <광란의 오를란도>보다 더 레어한 <오를란도 핀토 파쵸>를 올렸다는 것 ㅋㅋㅋㅋ

프랑스 기사문학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꼽히는 <롤랑의 노래>는 이탈리아로 건너가면서 주인공 ‘롤랑’의 이름이 ‘오를란도’로 바뀌었고 창작자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여러 이야기들이 탄생했다. 이탈리아 페라라의 데스테 가문에서는 보이아르도가 오를란도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담은 <사랑의 오를란도>를 썼고 루드비코 아리오스토가 이 작품의 후속편 격인 <광란의 오를란도>를 썼는데 비발디는 아리오스토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오페라를 1727년 발표했다. 줄거리가 은근히 복잡한데 크게 메도로와 사귀는 안젤리카의 마음을 얻으려는 오를란도의 이야기와 브라다만테와 사귀는 루지에로의 마음을 얻으려는 알치나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헨델은 두 이야기를 각각 <오를란도>와 <알치나>로 만들었음) 오를란도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안젤리카는 묘약을 갖다 달라며 오를란도를 위험한 동굴로 보내고 모든 것이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오를란도가 개빡쳤기 때문에 지금의 제목이 붙었다. 알치나의 마법에 걸려 연인인 브라다만테를 잊어버리지만, 이내 그녀와 힘을 합쳐 알치나의 마법에서 벗어나는 루지에로의 이야기, 광란에 휩싸여 알치나의 신전을 때려 부순 뒤 아스톨포의 도움으로 이성을 되찾는 오를란도 이야기 등등 사랑-배반-죽음으로 끝나는 낭만시대 오페라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빠져들기가 쉽지 않은 작품인데 그도 그럴 것이 소프라노인 안젤리카와 바리톤인 아스톨포를 빼곤 죄다 콘트랄토나 카운터테너만 나오기 때문에 음반으로 들으면 어떤 게 누구 노래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고 자가 복제 달인인 작곡가의 특성상 이 곡이 저 곡처럼, 저 곡이 그 곡처럼 들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비발디 특유의 연주자를 괴롭히는 힘차고 빠른 노래들이 무척 신나고 매력적이다. 특히나 저게 가능한가 싶은, 한계까지 치닫는 멜리즈마는 기인열전을 방불케 한다.
 

같은 연출 유리 미넨코(Yuriy Mynenko) 버전 오를란도 아리아


이번 연출은 덜 유명한 극장들의 오페라를 스트리밍하는 유튜브 채널 오페라 비전(Opera Vision)에서 꽤 오랜 기간 상영해준 덕분에 무대를 미리 살펴보고 갈 수 있었다. 페라라는 중앙에 12석, 양 옆 4석밖에 안되는 작은 극장인데 그래서인지 무대가 상당히 조촐했다. 화려한 알치나의 신전은 쇼파, 테이블 같은 몇몇 가구들, 선물 더미가 전부였고 이야기의 중요한 서사가 되는 부분들은 미디어아트로 대체했으며 종종 벽과 천장에 거울을 등장시켜 오를란도가 미쳐가는 혼란스러운 이 상황이 객석에 있는 우리 이야기라는 점을 나타냈다. 또 무대 앞에 검은 투명한 막을 수시로 내린 뒤 그 위에 영상을 쏘거나 가수들이 그 상태에서 노래했는데 스트리밍으로 볼 땐 이게 무척 답답하고 전체적인 무대를 볼 수 없으니 뭔 의미인가 싶었다. 근데 실공으로 보니 미디어아트의 경우 아리아에 따라 산들거리는 바람이 불고 폭풍이나 눈보라가 치는 모습,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풍경 등 등장인물의 정서와 알치나의 마법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1막 오를란도의 대표 아리아 ‘Nel profondo cieco mondo’를 부를 때였는데 이게 유튜브로 볼 땐 걍 시커멓기만 했는데 무대 뒤에 우주 공간에 내던져진 듯한 주인공의 모습을 영상으로 쏘고 가수 앞에 막을 내리고 그 위로도 영상을 쏴서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2막 오를란도가 안젤리카와 메도로의 결혼서약서를 읽는 부분에선 결혼 서약서 속 텍스트가 뒤죽박죽한 이미지로 나타나면서 평정심을 잃어가는 오를란도의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효율적으로 보여줬다. 미니멀한 무대와 달리 루지에로와 브라다만테는 빨간색, 알치나는 진한 파란색 의상을 입었다. 해외 리뷰를 찾아보니 각 등장인물마다 르네상스, 19세기 초,  20세기 초를 상징하는 의상들로 구성했다고 하는데 강렬한 의상 색들이 무채색의 미니멀한 무대를 풍성하게 채워줬다.


루지에로 아리아 부르는 필리포 미네치아


이번 공연은 이태리에 무슨 연줄이 있나 싶을 만큼 현재 굉장히 잘나가고 있는 고음악 가수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 다들 좋았지만 내 기준 베스트 세 명은 오를란도, 알치나, 루지에로 였음. 오페라 비전 스트리밍에서 루지에로로 나왔던 카운터테너 필리포 미네치아(Filippo Mineccia)가 타이틀롤을 맡았는데 이미 돌은 듯한 눈빛이 오를란도랑 굉장히 잘 어울렸고 ㅋㅋㅋㅋㅋㅋ 섬세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어려운 아리아들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알치나 역의 콘트랄토 안나 보니타티부스(Anna Bonitatibus)는 종종 소리가 너무 작아질 때가 있긴 했지만 음색이 너무 예뻤고 비발디 특유의 다이내믹한 표현들을 잘 보여줬음. 원래 예정돼 있던 소냐 프리나 목소리를 별로 안 좋아해서 바뀐 캐스트가 무척 만족스러웠다. 루지에로 역의 카운터테너 다닐로 파스토레(Danilo Pastore)는 음색이 상당히 독특했는데 뭔가 가성이 아니라 진성으로 부르는 것 같은 느낌? 비주얼 때문인지 기대 만땅이던 ‘sol da te mio dolce amore’ 때 몰입하기가 쵸큼 힘들었다 ㅋㅋㅋㅋ 
 

줄리오 프란디 &copy;Francesco Agostini


지휘는 줄리오 프란디(Giulio Prandi)가 맡았다. 본인이 창단한 기슬리에리 합창단, 오케스트라(Coro e Orchestra Ghislieri)로 라 스칼라도 가고 RCO도 가고 이태리 숨은 작곡가들 작품도 발굴하고 페르골로지, 헨델, 비발디 등등 여러 레파투어를 가진 요새 존나 잘나가는 40대 지휘자다. <돈 조반니> 때 디오 오케한테 크게 데인 다음, 이건 푸르트뱅글러가 와도 구원할 수 없는 연주라고 생각해 처음에 악단 이름을 보고 좌절했다. 다행히 현지 오케인 바로크 성령 오케스트라(Orchestra Barocca Accademia dello Spirito Santo, 번역이 이게 맞나요…)가 함께 내한하고 하프시코드, 트라베르소, 호른 등 주요 악기를 현지 연주자들이 소화한 덕분에 진짜 귀호강 하는 연주를 들을 수 있었음. 루지에로 아리아에서 트라베르소가 진짜 쩔었는데 곡 끝나고 지휘자가 따로 인사 시켰을 때 관객들도 엄청난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연습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텐데 지휘자가 멱살잡고 끌고 간 건지 튀거나 거슬리는 것 하나없이 두 오케가 조화롭게 연주했다. 대구 오페라 극장은 엉덩이 들면 지휘자 뒤통수에 손 닿을 만큼 객석 중앙 맨 앞줄과 오케스트라 피트가 상당히 가까운데 여기서 본 덕분에 지휘자의 디렉션을 맘껏 감상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지휘자들의 특징인 건지 줄리오 프란디는 다음날 팔에 알베길 것 같은 화려한 움직임으로 연주자들을 리드했고 틈만 나면 세상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자네티가 오버랩 되는) 유튜브에서 검색해보니 굉장히 학구적이고 연주하는 것만큼이나 음악을 알리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도 왕왕 보이던데 고음악 지휘자들의 강력 범죄가 잇따르는 지금, 사고 없이 무사히 경력을 이어 나갔으면 좋겠다. 참고로 대구에 와서 안경 깨먹어서 급하게 다시 맞췄음 ㅋㅋㅋㅋㅋ 우리나라 쾌속 문화에 반하셨으니 또 와주세여…

<광란의 오를란도>는 줄거리만 보면 안젤리카의 거짓말에 속아 겨우 살아 돌아오고, 광기의 사로잡힌 오를란도가 알치나의 신전을 무너뜨리는 2막 후반과 3막이 가장 클라이막스처럼 보인다. 그런데 웬걸. 가장 중요한 이 장면들을 비발디는 대부분 레치타티보로 구성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명곡이 끊이지 않던 1, 2막과 달리 3막은 진짜 읭??? 스러운 구성. 미네치아가 연기력이 좋아서 망정이지 웬만한 내공이 쌓인 가수가 아닌 이상 오를란도 역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다. 오를란도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부분도 그냥 대사로 처리해버려 훼이크로 속이고 뒤에서 칼침 놓을 것 같다. 그러고 갑분 합창으로 마무리하는 게 기승전결이 매우 잘못된 느낌. 줄거리는 그렇다 치고 음악 구성을 왜 저렇게 한건지 궁금하다. 근데 그건 비발디 문제이고 공연은 너무너무너무 너어어어무 좋았다. 

페라라 극장에서 나름 큰 프로젝트였는지 대부분의 스탭들이 다같이 왔다. 연출가, 조명, 무대미술도 오고 세트 움직임이 은근 자주 나오고 프로젝션 맵핑이 사용되는 만큼, 테크니션들도 다 왔다. 심지어 예술감독까지  와서 커튼콜 때 대구 예술감독이랑 포옹하는데 웃음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공연을 5만원에 젤 앞줄에서 보다니… 앞으로도 바로크 오페라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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