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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개미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살로메 231007

willow77 2023. 10. 13. 23:30

 

 
작년에 정말 좋은 기억을 선물해줬던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에 또 다녀왔다. 올해는 국내에서 보기 어려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을 두 개나 올리는데 <살로메>와 <엘렉트라>를 티켓 오픈일에 예매해 지난주에 개막작 <살로메> 먼저 보고 왔음. 조기 예매하면 R석을 5만원에 볼 수 있다. (대신 교통비도 왕복 6만원 ^^...) 국내에는 노래 잘하는 소프라노들이 정말 많은데도 불구하고 미친년들이 나오는 오페라를 보기 쉽지 않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룰루> 등등 정말 많은데... <살로메> 역시 2008년에 초연해 몇 번 안 했고 <엘렉트라>는 이번 대구 공연이 국내 초연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바탕으로 탄생한 <살로메>는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러닝타임과 1막으로 구성돼 장소 전환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스토리 라인, 중창보단 독주곡이 많아 가수의 노래 실력만큼 연기력이 무척 중요한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요나한과 나라보트를 제외한 주역 살로메, 헤롯왕, 헤로디아스를 독일, 오스트리아 가수들로 캐스팅했고 요나한과 나라보트 역시 독일에서 활약하고 있는 가수들이 맡아 최고의 무대를 보여줬다.
 
차가운 대리석 위 목재 구조물로 공간이 나뉜 가운데 연회장을 뒤로하고 밖에 나온 나라보트와 시녀가 살로메의 아름다움과 달의 불길함을 노래한다. 와 씨, 나라보트 첫 대사부터 노래 성량 다 개쩜. 이 작품에서 제일 병신같은 역할인 나라보트는 테너 유준호가 맡았는데 빈 폭스오퍼에서 10년 이상 전속 가수로 활동한 짬을 제대로 발휘해 멋지게 소화했다. 나라보트는 살로메에게 요한을 보여주는,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상황을 만든 만악의 근원인데 중반쯤 요한에게 키스하고 싶어 정신 나간 살로메를 보고 현타를 느끼곤 자살해버린다. 작품의 스타트를 끊고 문제를 유발하는 굉장히 중요한 배역임에도 불구하고 중도 하차하다 보니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맡을 때가 많고 중반 이후 스토리가 휘몰아치면서 잊혀지는 인물이다. 테너 유준호는 중간에 죽은 게 아쉬울 만큼 노래도 잘했고 살로메를 사랑하는 마음을 잘 표현해줬다.
 
병사들의 대화에 이어 곧 구세주가 올 거라는 요하난의 노래가 시작된다. 함부르크, 도이체오퍼에서 활동한 바리톤 이동환이 맡았는데 이분도 존나 잘함ㅋㅋㅋㅋㅋㅋ 작품 보기 전에 예습 차 여러 프로덕션을 보고 갔는데 실공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봤던 요하난 중 젤 잘함. 객석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반주가 꽝꽝 울리다 보니 전반적으로 노랫소리가 잘 안 들렸음. 요하난은 설정상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 무대 위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지휘자 맞은편, 오케스트라 피트 맨 끝에서 노래했는데 그 큰 오케 소리를 뚫고 가장 선명한 소리를 들려줬다. 쩌렁쩌렁 울리는 부분도 좋았지만, 단조와 장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멜로디를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강렬한 레가토로 아름답게 연주했다. 저 목소리로 계속 극딜하니 헤로디아스로선 당연히 죽이고 싶을 듯.
 
헤롯왕의 시선강간이 기분 나빠 밖으로 나온 살로메의 첫 등장. 슈트라우스와 바그너를 주로 뛰는 독일 소프라노 안나 가블러(Anna Gabler)가 맡았는데 테너랑 바리톤이 워낙 쩔어주다보니 솔직히 제일 약했다. 특히 금관 등장할 때마다 목소리가 너무 안 들렸는데 맨 앞에 앉은 탓도 있는 것 같음. 나라보트에게 졸라 요하난을 만나게 된 살로메는 키스해달라며 겁나 치덕대고 이를 뿌리친 요하난은 다시 감옥으로, 현타를 느낀 나라보트는 자결하며 전반부가 마무리된다. 이번 공연에서 무대를 세 구역으로 나눴는데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돌아가며 장소나 화제가 전환된다. 나라보트의 자결 후 간주곡이 길게 진행되는데 그동안 무대가 회전하며 각 인물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연출이 무척 감각적이고 영화적이게 느껴졌다. 공기 같던 시녀에게 나라보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서사를 부여한 점도 매력적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대를 나눈 구조물인데 아무것도 안보이게 막혀 있거나 훤히 다 보이게 뚫린 게 아닌 건너편이 흐릿하게 보이는 두꺼운 비닐을 덧대 관객이 이 모든 상황을 몰래 관음하고 있는 듯한 야릇한 느낌을 줬다. 가령 나라보트가 자살하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는게 아니라 “못 견디겠어!”하고 건너편으로 뛰어 가면 총소리가 나고 비닐에 피가 튀는 식.  2016년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극장에서 초연한 연출이라고 하는데 이 같은 연출 방식은 후에 등장하는 일곱 베일의 춤에서 더욱 돋보였다.
 
나라보트 자결을 기점으로 이야기가 전환되면서 헤롯왕과 헤로디아스가 등장한다. 모든 오페라가 다 그렇지만 <살로메>는 특히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다시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인물들이다. 처음에는 강렬한 등장이 인상적인 요하난, 타이틀롤인 살로메에게 눈이 가지만 볼면 볼수록 헤롯왕과 헤로디아스, 나라보트까지 노래가 은근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각 개성이 도드라지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헤롯왕의 캐릭터가 다시 보일 만큼 볼프강 아블리어 슈페르하케(Wolfgang Ablinger-Sperrhacke)가 최고의 연기와 노래를 보여줬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분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2019년에 올렸던 마를리스 페테르센(Marlis Petersen) 주연 <살로메>에서도 헤롯왕으로 나왔고 이밖에 취리히, 라 스칼라 등등 메이저 극장 겁나 뛰는 베테랑이다. 참고로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살로메>는 바를리코브스키(Krzysztof Warlikowski)가 연출했는데 ‘살로메 안네의 일기 버전 느낌으로 쩌리역인 나라보트를 파볼 브레슬릭(Pavol Breslik)이 맡았었다. 이번 공연에서 헤롯왕은 노래도 잘하지만 연기도 개쩔었는데 찾아보니 원래부터 실험적인 연출에 거부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더만 ㅋㅋㅋㅋㅋ 아래는 2010년 글라인드 본에서 올린 <헨젤과 그레텔>인데 존나 잘어울리고 존나 잘함 ㅋㅋㅋ 얼굴도 모노스타토스랑 헤롯왕에 너무 찰떡이야 ㅠㅠㅋㅋㅋㅋㅋ
 

 
스토리 때문이겠지만 헤롯왕은 대사도 노래도 다 기분이 되게 나쁘다. 화음 1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노래는 인상 쓰게 만드는데 슈페르하케는 그냥 전체적으로 귀엽고 노래도 직접 들어서 그런건지 이상하게 감미로웠다. 연기는 역시 ‘일곱 베일의 춤’이 정점이었는데 그냥 암시만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을 연출은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음악이 시작되면 춤을 추던 살로메가 옷을 하나씩 벗고 헤롯왕은 폰을 꺼내 이를 촬영한다. 그리고 목재와 비닐 구조물로 구분된 무대가 천천히 돌아가는데 아까 말했듯 보일락 말락, 보였다 말다 하는 방식이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 상황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 들게 했다. 거기다 훔쳐보는 그 상황이 근친이라 죄의식이 더블로 들게 함. 살로메의 탈의에 이어 둘의 역할이 바뀌어 헤롯왕도 옷을 벗기 시작하고 살로메가 이를 폰으로 촬영한다. 음악이 고조되면서 무대도 점점 빠르게 돌아가는데 그 와중에 두 사람이 촬영하는 영상이 프로젝터를 통해 무대 전체에 쏘아진다. 이것도 신비하면서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살로메를 음흉하게 보며 옷을 벗는, 의도가 무척 불순한 헤롯왕의 무브먼트는 슈페르하케의 비주얼과 만나 의외의 귀욤미를 내뿜었다. 다 벗고 나중에 빤쓰만 입고 있는데 배가 너무 나와서 귀욤미가 더 올라감 ㅋㅋㅋㅋㅋ 슈페르하케의 연기력과 노래는 춤씬 이후 요하난의 머리를 내놓으라는 살로메를 설득하는 부분에서 더 잘 나타난다. 이 보석도 주마, 저 보석도 주마 한참 진행되는 노래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고 장조, 단조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음악 속에서도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헤롯왕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됐다. 헤로디아스를 맡은 하이켈 베셀(Heike Wessel)도 쩔었다. 살로메가 딸린다는 걸 헤로디아스 때문에 알 수 있었는데 불협화음 속에서 툭툭 뱉어내는 소리가 정말 또렷하게 들렸다. 그 큰 금관 소리를 뚫고 객석까지 그대로 전달됐음. 요하난의 극딜에 잔뜩 예민해진 모습, 헤롯왕의 반지를 뺏고, 요하난의 머리를 내놓으라는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연기가 카리스마 작렬이었음. 헤로디아스를 꽤 여러번 맡은 것 같은데 진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이런 건가 싶었다. 결국 요하난의 머리를 얻게 된 살로메. 예상과 달리 댕강댕강은 나오지 않고 목에 상처가 잔뜩 난 채 죽은 요하난이 등장했다. 노래가 선명하게 들리지 않아 아쉬웠지만, 연기만큼은 최고였다. 10분 넘게 이어지는 소프라노 솔로 구간을 직접 무대에서 보니 경이롭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작년에 오케 연주가 개쒯이었어서 기대가 바닥이었는데 대구시향이 맡아서 그런지 다행히 괜찮았다. 지휘를 맡은 로렌츠 아이히너(Lorenz C. Aichner)는 에르푸르트, 함부르크에서 부음악감독을 역임했는데 수원시향이랑도 공연하고 우리나라랑 꽤 인연이 있는 지휘자인 듯. 영상으로 봤을 때 그저 불협화음, 듣기 싫은 구간이 많았는데 실공연으로 보니 강약 조절과 호흡이 도드라졌다. 그런 구간이 또 하나 있는데 중반 이후 등장하는 유대인들과 나사렛인들의 언쟁씬이다. 진짜 볼 때마다 “그냥 막 부르는 거 아냐?” 싶었는데 그동안 느껴지지 않던 음표의 존재가 느껴졌다 ㅋㅋㅋㅋㅋ 개개인별 노래는 말할 것도없고 불규칙적인 박자와 규칙적인 불협화음을 최고의 호흡으로 들려줬음.
 

 
작품 자체가 국내에서 레어한데다가 연출도 가수들도 최고의 실력을 보여준 무대였는데 생각보다 홍보가 잘 안 된 것 같아 아쉽다. 기사도 별로 없고. 심지어 대구시청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대구문화> 10월호에도 별 기사가 없음. 지역 문화단체이니 제약이 많은 건 알겠는데 콘텐츠 뽑을 게 수두룩 빽빽한 지금 유튜브 채널이나 인스타그램 보면 정말 안타깝다 ㅠㅠ 너무 재미없고 업데이트 빈도도 적음... 지난주에 개막했는데 이후 나온 유튜브 영상이 20주년 축사 모음 1개인 거 실화냐... 한달 전쯤 올린 메인 오페라 미리보기 영상도 가수들이 그냥 나와서 줄거리랑 포인트를 핵노잼으로 설명해주는 내용이더라... 해외 캐스트들이랑 같이 대구 맛집 투어하는 것만 영문 자막 만들어 같이 올려도 흥할 것 같은데... 게다가 국내에서 유일한 오페라 전문 극장이 여는 오페라 페스티벌이 무려 20주년을 맞이했는데 별 이슈가 안되는 것 같아 아쉽다. 오래오래 가려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야 하는데 ㅠㅠ 진짜 국내에서 이 가격에 이 퀄인 오페라 공연 없는데... 홍보나 마케팅 부분에 신경 좀 써주셨으면 ㅠ 애정하는 마음에 하는 소리니 혹시 관계자가 보신다면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