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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자네티의 경기필 임기 마지막 오페라, 경기아트센터 피가로의 결혼 220303 본문

문화개미

마시모 자네티의 경기필 임기 마지막 오페라, 경기아트센터 피가로의 결혼 220303

willow77 2022. 3. 5. 02:05

 


2019년쯤엔가 봤던 경기필x자네티 <돈 조반니>가 실망스러웠던 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너어어어어어무 좋았다. 특히나 지휘는 얼마 전 스트리밍으로 봤던 두다멜 저리가라 할 정도로 치고 빠지는 강약조절과 흐름이 예술이었다. 나중에 내한하지 않는 한 자네티와 경기필의 마지막 오페라라서 그런지 가수들 경력도 기량도 쩌는 사람들이 함께했다. 마시모 자네티는 2018-2019 시즌 경기필과 함께한 이래로 한 차례 재계약 끝에 올해로 임기가 마무리된다.

콘서트 형식이라길래 오케가 무대 위 가수들 뒤에 있는 구성을 상상했는데 이 정도면 풀 스테이지 아닌가 싶다. 왜 ‘콘서트 오페라’라는 겸손한 표현을 썼는지 의문. 노래도 많이 자를 줄 알았는데 웬만하면 다 자르는 마르첼리나, 돈 바질리오 아리아만 잘랐지, 풀로 상연했다. 인터미션 15분 빼고 150분으로 안내했는데 7시 반에 시작해 10시 반 넘어서 끝났으니 3시간 가까이 한 셈이다.

티켓팅 대기했다가 예매한 덕에 맨 앞 중앙에서 봤다. 오케가 무대 앞에 있는 구성의 공연이 오랜만이었는데 지휘자 자리가 객석과 이렇게 가까웠나 싶었다. 그리고 포디움이 다소 높았는지 지휘자가 무대를 가려 피해 가면서 봤다. 덕분에 자네티의 지휘 디렉션을 마음껏 감상했다.

다양한 유형의 지휘자들이 있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스타일 탓에 잡음도 나지만 결국엔 오케를 지배하고 연주를 뽑아내는 지휘자, 연주퀄은 개쩔지만 교감은 느껴지지 않는 지휘자, 심지어 눈도 감고 있음.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오케를 이끄는 지휘자 등등. 무대 위에서만 본 마시모 자네티는 부드러움을 무기로 단원들과 교감하는 데에는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늘 암보로 지휘하는 그는 연주 내내 단원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추며 튀어나올 타이밍, 피아니시모 타이밍, 밟을 타이밍을 세세하게 지시했다.

그리고 뭔 놈의 따봉을 계속 날리시는지. 기악 솔로 끝날 때마다, 강조되는 솔로 부분 있을 때마다 자애로운 미소와 따봉을 동시에 계속 보낸다. 관 파트 단원들은 아마 1따봉씩 받지 않았나 싶다. 사정없이 밟아야 할 부분에는 팔에 알배기지 않나 싶을 정도로 지휘봉을 휘두르고 오케와 같이 호흡한다. 서곡 시작할 때부터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잘못 들었나 했는데 지휘자가 내는 소리였음. ㅋㅋㅋㅋ. 이후에도 크게 밟아야 할 때마다 ‘크어어엉’ 거리며 지휘자가 관크를 보여주셨다. ㅋㅋㅋㅋ 물론 거슬릴 정도는 아니고.

레치타티보 때는 앉아서 우리와 같은 관객 모드가 되었다. 연주 마치고 레치타티보 칠 때마다 단원들을 독려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단원들 뿐 아니라 가수들 아리아가 끝날 땐 세상 흐뭇한 표정으로 함께 박수치고, 극 중간중간에도 단원과 가수들을 향해 따봉을 날리고 응원하며 극을 이끌어갔다. 저게 레알 환갑 넘은 어르신의 체력이 맞는지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세상 자애로운 미소와 행복해하는 표정이 직업 만족도 최고였음. 지휘자들이 오래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연습 때는 어떤지 알 턱이 없지만 무대 위에서 자네티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런 지휘자가 있기에 오케도 가수들도 최고였다. 레치타티보 반주자를 객원으로 데리고 왔는데 중간중간 원곡에 없는 멜로디를 끼워 넣었다. 2막에서 백작이 도끼 들고 올 때 모퀴엠 라크리모사를 잠깐 연주하는데 지휘자도 빵터짐.

가수들의 경우 지난번 성남아트센터 <돈 조반니> 공연에서 봤던 우경식 바리톤과 전태현 베이스 바리톤, 박누리 소프라노가 출연해 무척 반가웠다. 그때보다 객석과 가수들 거리가 넓고, 오케 소리도 빵빵해서 그런지 합창 때마다 소리가 작게 들렸는데, 신기하게도 개별 아리아에서는 또랑또랑하게 잘 들렸다. 우경식 바리톤은 그때도 느꼈지만, 노래도 노랜데 레치타티보를 어쩜 저렇게 맛깔나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딕션도 귀에 와 박히고 성악가 비율상 가장 흔한 바리톤인데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구별될 정도로 개성있다. 내지를 땐 사정없이 강하고 피아니시모 때는 특유의 미성이 정말 예쁘게 들렸다. 박누리 소프라노도 쩌리 역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들 사이에서도 튈 만큼 제 역할을 다 해주었다.

극의 중심이 되는 수잔나와 타이틀 롤도 좋았다. 피가로 맡은 손혜수 베이스는 주역으로 나온 공연을 처음 봤는데, 검색해보니 굉장한 고인물이었다. 그리고 기껏해야 30대 중반쯤으로 생각했는데 팬텀싱어 출연자 아니고 심사위원으로 나올 만큼 연배가 꽤 있는, 국내 기준으로 노익장 가수였음. 모든 장면에 다 등장하는 수잔나 역의 박하나 소프라노도 3시간이 이어지는 긴 러닝타임 가운데서도 마지막 아리아까지 훌륭하게 소화해주었다. 백작부인 이정혜 소프라노는 2막 첫 아리아는 조금 아쉬웠지만, 3막 도베 소노는 최고였다. 이날 하도 오랜만에 오페라가 열려 관객들이 타이밍을 못 잡아서 그런건지 박수가 유난히 안 나왔는데 도베 소노랑 3막 백작 아리아 끝나고 가장 큰 박수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아 진짜 모든 아리아 끝날 때마다 박수 오지게 치고 싶었는데 다들 안쳐서 넘 답답했음... 참았던 박수는 커튼콜 때 쏟아져 나왔다.

연출은 여전히 아쉽긴 했다. 최근에 파리에서 올렸던 <피가로의 결혼>을 봐서 더 그런건지 특별할 건 없었다. 배경을 알 수 없는 묘한 시대극 의상이 주를 이뤘는데 그냥 현대극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의자를 천장에 매달아둔 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프레임으로 장소를 구분해두고 구성한 것은 좋았다. 가수들 연기력이 딸렸으면 뭥미 했을텐데 다들 찰떡같이 잘했음. 자막을 ‘그랬오’, ‘했소’ 같은 옛날 말투로 번역하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초야권을 ‘봉건제도’로 번역한 건 너무 이상했다. 봉건제도가 나쁘기만 한 건 아닌데...


공연도 너무 좋았고 특히나 지휘자가 있는 열정, 없는 열정 다 보여준 가운데 커튼콜 때 쏟아지는 박수세례를 받으며 인사하는 자네티를 보니, 자네티 없는 경기필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적당히 임기 떼우다 갈 수도 있었지만, 자네티는 그동안 스테디셀러뿐 아니라 슈만, 레스피기 같은 마이너한 레퍼토리도 개발하며 단원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저변을 동시에 넓혀주었고, 늘 암보로 연주하며 단원들과 소통해왔다. 비록 한국은 떠나지만 그가 어디에서든 늘 행복하게 연주했으면 좋겠다. 올해 임기 마지막을 앞두고 예정된 경기필의 교향악 축제와 베르디 레퀴엠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