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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뽕 차오르는 공연을 보았다, 성남아트센터 돈 조반니 211009 본문

문화개미

국뽕 차오르는 공연을 보았다, 성남아트센터 돈 조반니 211009

willow77 2021. 10. 10. 22:46

국내 오페라 공연은 대부분 그랬다. (호른 삑사리 디폴트) 무난한 반주, 튀지 않는 가수들 속 몇몇 구멍, 그리고 서곡이 끝나고 막이 오르면 이게 오페라인지 학예회 인지 모르겠는 리디큘러스한 가발과 의상으로 도배된 쌉노잼 연출. ‘돈이 아깝다’라는 생각까지 들진 않지만, 공연장까지 찾아간 수고스러움 때문에 열받고, ‘대체 왜 국내에서 오페라를 올리면 저 모냥일까’ 하는 아쉬움은 늘 있었다. 유명한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럼.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이번 성남아트센터에서 올린 <오페라 정원-돈 조반니>는 간만에 본 돈도 시간도 아깝지 않았던 귀한 공연이었다. 세미 스테이지로 꾸린 콘서트 오페라였지만, 풀스테이지 부럽지 않은 퀄리티였고 오케 연주가 크게 특별하진 않았지만 가수들의 연주만큼은 그대로 베를린에 갖다 올려도 될 만큼 최고였다. ‘한국인들은 어쩜 이렇게 노래를 잘할까’하는 근원적인 호기심이 생길 만큼 해외 유명 가수들이 안 부러웠고, 수도권 도심에서 이런 공연이 열린다는 게 경기도민으로서 감개무량했다. 게다가 R석이 4만원이라니 완전 혜자.

<오페라 정원> 시리즈를 <돈 조반니>로 처음 접했지만, 찾아보니 성남문화재단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작년 7월 <피가로의 결혼>을 시작으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데 젊고 역량 있는 국내 성악가를 발굴한다는 취지 아래 기존 유명 성악가를 캐스팅하는 대신, 공연에 설 가수들에 대한 공개 오디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동영상 실기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최종 선발했는데 <피가로의 결혼>의 경우 최대 18: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이번 <돈 조반니> 가수들 역시 그 과정으로 선발된 것인지 다들 그냥 존나 무대를 찢었음.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돈 조반니>는 소프라노들의 파트 비율이 비슷비슷한데 셋 다 잘하는 국내 공연을 이번에 처음 봤다. 돈나 안나 역이었던 이정은 소프라노는 뭐 산타체칠리아 음악원 나온 교수님이니까 넘사벽이라고 치더라도 신예 소프라노로 주목받는 엘비라 역 김신혜 소프라노도 노래, 연기 다 쩔었다. 개인적으로 세명 중 엘비라가 분노, 슬픔, 어이없음, 안타까움 등등 표현해야 할 감정이 많아 연기하기 무척 까다로운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리고 아직 서울대 음대 대학원 재학 중이라는 박누리 소프라노. ‘뭐지?’ 싶을 정도로 존나 잘함. 마제토 달래주는 체를리나 아리아의 경우 고음도 고음인데 중간에 급저음으로 내려가야 하는 부분에서 많은 가수들이 소리를 뭉개버려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음. 특히나 체를리나 역의 소프라노들이 소리는 예쁘지만 성량이 크진 않은 편인데 이분은 큰 오케 반주 소리를 뚫고 귀에 가사를 때려 박아주셨다. 검색해보니 요새 국내 콩쿨을 다 휩쓸고 다니던데 나중에 해외 무대를 어떻게 휩쓸지 무척 기대된다. 교수님이니까 당연히 넘사벽이라고 하고 넘어갔지만, 이정은 소프라노도 핵노잼 구간인 돈나 안나 파트가 끝나지 말길 바라게 해줄 만큼 훌륭했음.

남자 가수들도 대단했다. 타이틀롤 우경식 바리톤은 베이스 바리톤에 더 가깝게 들렸지만, 레포렐로를 맡은 전태현 베이스 바리톤이랑 음색이 꽤나 잘 어울렸다. 또 두 사람 다 연기도 찰떡이었는데 검색해보니 우경식 바리톤은 8년이나 독일 킬 극장 전속가수로 활동했고, 전태현 베이스 바리톤 역시 북미 극장에서 활약했던 경험이 있었다. 난 두 사람 다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다 짬바였어. 특히나 <돈 조반니> 국내 공연 때마다 노래만큼 신경 써주지 않는 연기가 늘 불만이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두 사람 다 키도 크고 역할 자체에 외모가 너무 잘 어울려서인 것 같기도 함.

쩔었던 또 한 사람은 기사장 역의 박기옥 베이스였다. 이건 국내 공연뿐 아니라 해외 공연도 마찬가진데, 워낙 타이틀롤이랑 서브 남주인 레포렐로 캐스팅에 공을 들이느라 베이스를 두 역할에 비해 쳐지는 사람을 데려올 때가 많다. 또 <돈 조반니> 안에서 기사장 분량이 쩌리라 네임드 베이스들이 잘 안 나오더라고. 르네 야콥스 내한 했을땐 베이스 한명이 마제토랑 기사장을 같이 하기도 했었음.

암튼 그렇게 기사장이 혼자 쳐지면 문제가 심각한 게 바리톤-베이스바리톤이랑 셋이 붙는 삼중창을 다 말아먹는다는 것이다. 오프닝이랑 묘지에서 저녁 식사를 초대하는 장면은 그렇다 치더라도 클라이막스인 2막 끝에 석상 등장 장면은 이걸 볼라고 <돈 조반니>를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베이스가 쳐지니 심심하게 끝날 수밖에. 아무리 타이틀롤이 사력을 다해 노래를 불러도 베이스의 굵직한 저음이 모자라다 보니 드라마틱한 장면이 되게 힘 없어지는 것이다. 근데 이번 공연은 베이스가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 등장할 때 혼자 마이크 썼나 착각할 만큼 성량도 대박이고 무엇보다 듣기가 너무 좋았다. 성량이 큰 베이스들은 음색이 뭐랄까 비루한 표현력으로 말하자면 좀 돼지 소리처럼 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분은 그냥 듣기에도 너무 좋았음. 프로그램 북에 부천 시립합창단원이라는데 사실인가. 합창단에 있을 실력이 아닌데.

다들 노래를 잘하다 보니 음악을 편집한 게 너무 아쉬웠다. 이 <오페라 정원> 시리즈가 다 그런 모양이던데 관객들이 지루할 만한 구간은 다 잘랐다. 노래랑 레치타티보를 삭제하기도 했지만, 노래 안에서도 반복되는 멜로디도 잘랐음. 근데 또 생각없이 자른건 아니고 스토리가 다 이어지도록 잘랐다. 가령 돈 조반니가 마제토 패는 부분을 자르고, 그런 마제토를 달래는 체를리나 아리아를 자르고, 2막 합창에서 체를리나가 레포렐로한테 ‘니놈이 마제토 팬놈이구나’ 하는 레치타티보도 자르는 식. 굉장히 치밀하고 촘촘하게 잘라놔서 가수들이 리브레토를 다시 외워야 하는 수준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인지 솔로 아리아들은 훌륭했지만, 합창 때는 호흡이 잘 안 맞았던 게 가장 아쉬웠다. 아니 그리고 인간적으로 안 그래도 타이틀롤 아리아 없어서 서러운데 <샴페인의 노래>를 꼭 잘라야 했나요... 오페라 관심없는 사람들도 아는 몇 안되는 성악곡인데 이걸 자르다니... 가수들이 워낙 쩔다보니 체를리나, 엘비라 2막 아리아 자른 것도 아쉬웠음.

콘서트 오페라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점 중 하나는 막이 없다는 것이다. 무대를 준비할 시간도 없고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가야 하는데 협소한 가운데서 나름 <돈 조반니> 속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마지막 석상과의 저녁 식사 장면을 여자들과의 난잡한 파티로 바꿨다는 점. 원래 식탁도 준비해야 되고, 음식도 준비해야 되고 음악단도 있어 다소 부산스러울 수 있는데 여기선 합창단원들이 나와 연기했다. 뭐 그래봤자 죄다 검은 셔츠에 검은 스키니진 입고 나와서 그렇게 야하진 않았습니다만, 국내 소규모 극장 연출에서 이 정도면 되게 과감한 시도임. 서곡이 끝나고 ‘제발 우스꽝스러운 가발이랑 분장만 없어라’ 바랐는데, 이 정도면 정말 감사하지. 석상과 만나는 묘지 장면도 기사장의 옷만 들고 연기 했는데 연출로서는 진짜 빈곤한 상황인데 가수들 연기력이 다했다.



국내 오페라 공연, 특히 정부예산으로 만드는 소규모 오페라를 볼때면 관객을 ‘오페라 알못’으로 여긴다고 느낄 때가 많다. 반주나 노래도 큰 감동이 없고, 특히나 연출은 관객들 수준을 바닥으로 보나 싶음. ‘이 정도만 해도 되겠지’,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할 텐데’. 그럴 때면 티켓값에 상관없이 공연 자체가 되게 괘씸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게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도 아니고, 트로트나 대중가요에 비하면 팬층도 한줌이라 ‘굳이 고민하며 만들 필요가 있냐’라고 할 수도 있음. 어차피 관객들도 저렴한 가격에 보는 거니 국가지원금 받은 걸로 그냥저냥 만들어서 올리면 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음. 근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만들기엔 국내에 재능있는 성악가들이 너무나 많고, 늘 이야기 하는 오페라 팬 한줌이라고, 관심가져주지 않는다고, 시장이 작다고 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들이 최고의 기량을 펼칠 무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정성 있는 고민으로 신예들을 발굴하고 관객에게도 즐거움을 선물하는 성남문화재단 <오페라 정원> 같은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