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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개미

평창대관령음악제, 평창 페스티벌 바로크 앙상블 220720

willow77 2022. 7. 24. 01:28

바로크 음악을 별로 안 좋아했다. 낭만주의 작곡가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베르디, 쇼팽, 슈베르트, 드보르작, 멘델스존 기타 등등등 들을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다양한 악기들의 무한한 선율과 공연장 떠나가라 뻐렁치는 강렬한 멜로디를 듣다 바로크를 들으면 그렇게 단순하고 비슷비슷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오죽하면 인공지능이 만든다고 덤빌까. 또 몇 번 국내에서 거의 하지 않는 바로크 공연에 갔을 때 세 번째 줄 안에 앉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 때문에 ‘역시 괜히 왔다’ 싶을 만큼 짜증 났음.


근데 이번 평창대관령음악제의 바로크 앙상블 공연은 이런 바로크 음악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바꿔주었다. 연주도 좋았지만 프로그램도 좋았고 바로크에 생소한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진행방식도 좋았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를 맡은 ‘평창 페스티벌 바로크 앙상블’은 지난 대관령겨울음악제 때 초연한 오케로 전국의 바로크 연주단 연주자들을 차출해 만든 TF 오케이다. 전국의 수준급 바로크 연주자들을 골라 모은 만큼 연주가 안 좋을 수 없었다.

프로그램도 너무 좋았는데 첫 곡은 비발디 ‘오보에와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G단조’로 바로크 악기들의 매력을 전했다. 보통 오보에랑 바이올린 둘이 메인인데 편성을 다소 바꾼 건지 리코더 두 개가 추가됐다. 맨 앞줄에 앉아서 그런지 오보에 소리가 워낙 뛰뛰빵빵 잘 들려서 리코더 소리가 조금 묻혀 아쉬웠다. 그렇지만 바이올린과의 합은 최고였고 바로크 특유의 담백한 소리라고 해야하나. 현대 악기에서 들리는 느끼한 소리들이 없어 너무 좋았다.

두 번째 곡은 프랑스 작곡가 장필리프 라모의 오페라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모음곡이었다. 쿠렌치스도 연주한 적이 있어 제목은 알고 있던 오페라인데 예습하기 전까지는 헨델 오페라처럼 거국적이고 무거운 내용이 담긴 오페라인 줄 알았다. ‘근데 노예로 팔려간 유럽인이 자비심 많은 주인을 만나 풀려나는 이야기’, ‘폭발하는 남아메리카의 화산’, ‘아메리카 원주민의 평화의 담배 의식’ 같은 안 거국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모음곡이 워낙 경쾌하고 밝은 곡들이 많아 로시니스러운 전개일까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고 극마다 무겁고 비극적인 드라마들로 진행시켰다고 한다. 공연 보자마자 윌리엄 크리스티가 지휘한 영상물 질렀는데 조만간 봐야지.

인터미션 다음에 선보인 곡은 장바티스트 륄리의 오페라 ‘서민 귀족’ 모음곡이다. 이 오페라도 돈 많은 부르주아 출신의 주인공이 귀족으로 신분 상승하기를 꿈꾸며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행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 같은 일상적인 주제를 담았다. 륄리와 라모는 서로 스승과 제자 사이라더니 오페라 내용과 곡 분위기도 무척 비슷하게 느껴졌다. 라모의 곡처럼 덩실덩실 춤추고 싶게 만드는 음악들이 가득했는데 애초부터 발레곡으로 출발한 음악이었으며 륄리는 춤을 그리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정도였냐면 옛날에는 지휘봉이 아니라 큰 쇠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박자를 맞춰 지휘했는데 그만 발등을 찔려 심한 상처를 입었다. 발을 자르면 살 수 있었지만 춤이 너무 좋아 발을 못자르고 버티다가 합병증이 생겨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춤을 좋아했다.

터키시 크레센트(Turkish crescent)


이 음악에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개쩌는 악기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터키(튀르키에)시 크레센트(Turkish crescent)’이다. ‘터키의 초승달’이란 뜻의 이 악기는 2m는 훌쩍 넘어 보였는데 꼭대기에 원뿔형 장식과 초승달 장식, 그 양옆으로 여러 개 종이 달려 있었다. 연주 안 할 때는 세워두었다가 연주할 때 연주자가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조심스럽게 들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랬더니 종소리가 째랭째랭째랭째랭째랭째랭 나는데 연주랑 섞일 때는 개성 있으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어울렸는데 혼자 따로 들을 때는 뭔가 중국집에 손님 온 느낌도 들었다. 웃긴 게 이 악기가 등장하는 시기가 많지 않고 등장해도 잠깐 연주되고 말았는데 연주하기까지 과정이 무척 험난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아무리 조심해도 계속 종이 부딪히다 보니까 째랭째랭의 잔상이 남아 웃겼음. 우리나라에서 하나 뿐인 악기로 어렵게 공수해왔다고 한다.

프랑스 외인 부대(French Foreign Legion) 행진에 등장한 터키시 크레센트


악기 정보를 좀 더 찾아보니 오스만 군대 행진 때 많이 사용하던 악기라 이름에 터키가 붙은 것 같다. 지금은 튀르키에 뿐 아니라 독일, 러시아, 칠레, 볼리비아 등등 유럽 국가 군대가 행진할 때 많이 사용하고 있고 20세기 초에는 의전 때 빠지지 않는 악기였다고 한다. 터키의 개성있는 악기가 등장하는 오페라지만 ‘서민 귀족’은 루이 14세가 오스만 제국에서 온 대사한테 삐져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극진하게 대접했건만 면담 결과도 신통치 않고 술탄의 공식 대사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륄리한테 터키인을 희화화하는 발레 희극을 만들라고 주문한 것. 그런 내용을 다 제쳐두고 모음곡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척 신나고 즐거웠다.

마지막 곡은 륄리의 라이벌인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가 쓴 ‘테 데움’이다. 소프라노, 카운터테너, 테너, 베이스, 합창단이 등장하는 이 작품 역시 루이 14세를 위해 쓴 곡이라고 한다. 들을 때마다 느끼지만 합창곡은 아무리 고퀄의 음반도 실공을 따라갈 수 없는 것 같다. 무려 윌리엄 크리스티 앨범으로 예습하고 갔음에도 이날 공연이 더 좋았다. 진심. 화음이 완벽하게 맞진 않았지만, 이중창과 솔로 부분은 다들 잘했다. 특히나 카운터테너 정민호는 독보적이었음. 가성을 쓰니 다른 가수들에 비해 소리가 작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음과 음을 잇는 부분에서 만들어내는 레가토는 정말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그리고 어쩜 저렇게 한결같이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하는지 참, 직업 만족도 최고더라. 다른 사람들 노래할 때 눈 감고 그리 감미로운 표정으로 감상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음. ㅋㅋㅋㅋㅋㅋㅋ

왼쪽부터 알도나 바르트닉, 임소정 소프라노, 정민호 카운터테너, 민현기 테너, 우경식 베이스 바리톤


그리고 트럼펫이 개쩔었다. 현대 악기들보다 개량이 덜 된 바로크 악기들은 연주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트럼펫이 최강이라고 한다. 음정을 만드는 밸브가 없어 반음을 내려면 오로지 연주자가 입술로 반음 소리를 내는 모양을 만들어 연주해야 한다. 클라이막스 마다 트럼펫이 계속 등장하는데 이바울, 윤종학 연주자 모두 큰 실수 없이 마무리했다.

모든 공연이 좋았던 것은 연주자들 덕도 있지만, 권민석 지휘자의 역할이 정말 컸던 것 같다. 고음악 연주자들이 대게 그렇듯 권민석 지휘자 역시 글쓰고 이야기하는 것에 관심이 무척 많은 것 같던데 그래서 그런지 이날도 연주마다 본인이 직접 해설을 덧붙였고 프로그램 북에도 이 공연을 비롯해 여러 페이지에 원고를 썼더라. 앞에서 소개한 터키시 크레센트도, 바로크 트럼펫 난이도도 지휘자가 알려줌. 테오르보, 첼로, 트럼펫 등 관객에게 익숙하지 않은 바로크 악기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줘서 유익하고 재밌었다. 다만 딕션이 조금 아쉬워서 잘 들리게만 이야기한다면 해설이 함께하는 바로크 시리즈의 진행자로도 나설 것 같다. 권민석 지휘자는 원래 리코더 전공자이기도 해서 연주자로서도 무대에 종종 서는 모양이더라. 해석도 무척 신났고, 바로크 특유의 강약조절도 돋보였다.

앵콜곡으로 알도나 바르트니크 소프라노와 우경식 베이스 바리톤이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4막에 나오는 이중창, ‘Forêts paisibles(평화로운 숲)’를 불렀다. 모음곡에도 등장하는 멜로디로 4막 제목인 ‘Les sauvages’는 ‘야만인들’, ‘미개인들’로 해석되는데 프랑스와 스페인 청년 두 명이 북미 원주민 소녀에게 구애하지만 소녀는 두 사람 대신 원주민 청년을 선택한다는 줄거리다. ‘헛된 욕망을 버리고 평화로운 숲에서 평화로운 것들을 즐기자’라는 내용인데 두 사람이 유혹하고 거기에 화답하는 연기를 해줘서 더 즐거웠다. 우경식 베이스 바리톤은 돈 조반니때 봤던 얼굴이 계속 나옴. 마지막 앵콜곡 역시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4막의 합창곡 ‘Tendre Amour’를 불렀다.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이중창, ‘Forêts paisibles(평화로운 숲)’. 2005년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윌리엄 크리스티 지휘로 열린 공연. 소프라노는 파트리샤 프티봉인데 춤도 노래도 중독성 쩐다.


공연은 무척 좋았지만 공연 외적인 부분에서 아쉬움도 남았다. 첫째로 이번 음악제 주제가 ‘마스크’라는데 기획 의도가 아예 와닿지 않았다. 프로그램 북에도 홍보 문구에도, 포토월에도 공연장 곳곳에 ‘마스크, MASK’란 글자가 써 있었고 심지어 개막공연에 조지 크럼이란 사람이 작곡한 ‘마스크를 쓴 세 명의 연주자를 위한 고래의 노래’를 연주했다. 프로그램북 도입부를 보니 팬데믹에서 엔데믹의 전환을 맞아 잡은 주제라는데 마스크는 정말 벗고 싶어 미치겠는 존재가 된 지 오래고, 기획 의도인 ‘연결’과 정반대인 ‘단절’을 상징하는 사물인데 왜 마스크라고 정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다시, 시작’, ‘잠시, 쉼표’ 뭐 이런 뻔하지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키워드를 잡는 게 어땠을까? 숨은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제대로 전하지 못했으니 기획의도는 잘못된 게 맞는 것 같다.

둘째로 굿즈가 정말 살 게 없었다. 뭐 다른 나라 페스티벌도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음악제 오기 전 강릉에 들렀다가 진로에서 만든 ‘두껍상회’를 보고 와서 그런지 굿즈가 더 하찮게 느껴졌다. ㅠ 생각나는 건 티셔츠랑 스카프, 커피잔, 에코백 정도인데 기념 티셔츠에는 앞서 말한 MASK가 겁나 안 예쁘고 크게 써 있었고 스카프랑 에코백은 아예 무개성, 커피잔은 가격은 디따 비싼데 마찬가지로 평창대관령음악제만의 정체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 대구오페라페스티벌 때 밤의 여왕 일러스트 그려진 손거울과 로고랑 일러가 같이 그려진 에코백 산 적이 있는데 이것처럼 로고 넣은 뱃지나 악기 일러스트 그려진 엽서, 메모지 같은 굿즈가 훨씬 나았을 것 같다. 결국 프로그램북 하나 삼.

더불어 내가 느낀 단점은 아니지만, 관객과 연주자가 같이 알펜시아에서 묵다보니 연주자들이 다소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공연보고나니 밤 9시 반이라 치킨이 겁내 땡겼는데 마침 매표소에서 표 찾을 때 비비큐 2,000원 할인쿠폰을 주길래 공연 끝나자마자 냅다 달려가 포장 시켰다. 치킨 냄새 풀풀 풍기면서 호텔로 들어왔는데 정민호 카운터테너를 비롯한 연주자들이 잔뜩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망해서 다음 엘베 탔는데 관객보다 연주자들이 더 민망하지 않으려나. 미친 그루피같은 애들이 오면 어쩔 싶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간 평창대관령음악제에서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고 왔다. 공연은 이거 하나 봤지만, 성심성의껏 기획하고 연습해서 올린 공연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숙박비에 식대에 공연비 몇 배에 달하는 돈이 나갔지만 그럴 만한 보람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음악제에 방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