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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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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2023

willow77 2023. 8. 19. 21:45

 
당최 이유를 모르겠으나 이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콘텐츠를 모두 서비스하는 메디치티비(medici.tv)에서 <피가로의 결혼>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해 VPN 앱을 받아 7일 무료 사용 결제하고 오스트리아로 지정해 봤다. 한달 구독에 8만 원이 넘어 결제하자마자 후덜거리면서 바로 취소했다. 가끔 유럽 극장에서 하는 스트리밍이 막힐 때가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음. 암튼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고도 꼭 보려던 이유는 연출이 마틴 쿠제이(Martin Kušej)라서… 좋게 말하면 신박한, 혹은 정신나간 오페라 연출가 삼대장이 있다면 지난번 이야기했던 바를리코브스키와 칼릭스토 비에이토(Calixto Bieito), 그리고 마틴 쿠제이다. 쿠제이는 2006년에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돈 조반니>를 올렸는데 이때도 시퍼런 조명을 중심으로 우중충한 분위기에, 여자모델들이 속옷만 입고 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피가로의 결혼>도 피와 알몸이 난무하는 프로덕션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점잖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되게 고상했다. 쿠제이가 연출한 2006년 <돈 조반니>와 2007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경우 당시에 유행했던 미니멀리즘 때문에 무대가 되게 휑 했었다. 이와 달리 이번 <피가로의 결혼>은 사실적인 소품과 세트가 돋보였고, 갱스터 혹은 마피아 가족이라는 설정이 더해져 느와르 영화 같은 느낌이 났다.
 

마틴 쿠제이가 2006년 연출한 돈 조반니. 여성의 성적상품화, 사용되고 버려지는 여성성, 쾌락주의자들을 저격한 연출이었는데 이때의 메시지가 훨씬 더 급진적인으로 느껴진다.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등장인물들 모두가 술과 마약을 빨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백작과 피가로는 계급만 다를 뿐 지하 세계의 마피아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백작부인은 남편 때문인지 늘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있고 피가로를 향한 수잔나의 마음 역시 그닥 진심 같아 보이지 않는다. 백작의 추파를 딱히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며, 이에 대해 피가로도 그닥 상관하지 않는 듯하다. 바질리오는 성직자 옷을 입고 있지만 페도필리아이고, 바르바리나 역시 술집에서 남자들을 꼬시며 돌아다닌다. 마르첼리나, 바르톨로를 포함한 조연들도 마약하는 것을 즐긴다. 누구 하나 도덕적으로 보이는 사람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순수함과 가장 가까운 인물은 원작에서 사고치고 다니는 케루비노뿐이다. 조직에 어쩔 수 없이 몸담은 것처럼 보이는 그는 백작과 피가로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당하고 있으며 바질리오 역시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다. 백작부인을 진심으로 연민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케루비노는 1막 끝 피가로의 아리아가 연주되는 동안 바질리오와 백작에게 크게 폭행당한다.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다 보니 <피가로의 결혼> 특유의 유머러스함은 대부분 사라졌다. 수잔나와 마르첼리나가 부딪히는 장면은 화장실에서 볼일보고 있는 마르첼리나의 휴지를 수잔나가 쎄비는 모습으로 변주됐고, 7중창이 등장하는 2막 피날레는 쓰레기더미가 가득한 뒷골목에서 상대 조직 첩자로 잡혀온 안토니오(원작에서 정원사)의 어그로질에 조직이 분열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때 바질리오는 기타 케이스에서 기관총을 꺼내고 바르톨로는 총인 줄 알았던 라이터를 켜 담배를 붙이며 소소하게 웃겼다. 이밖에 3막 백작의 아리아가 연주되는 동안 전라의 여성이 백작의 옷을 입혀준다던가, 클럽에서 결혼식이 이뤄지는 동안 합창단이 헤드폰을 낀 채 다같이 이상한 춤을 추는 등등 일반적이지 않은 장면들이 많았지만 신박하진 않았다. 오히려 1막에서 초야권을 거두고 결혼을 허락해달라는 합창단 연주 때 어린 여성들이 유리창밖에서 피(인 것 같은데 색깔이 똥색임)를 뿌리는 장면이나 4막에서 남성들이 갈대 숲에서 사슴을 사냥해 어깨 위에 이고 오는 장면은 너무 노골적이게 느껴졌다. 연출의 메시지도 기대한 것만큼 와 닿지 않았는데 비도덕적인 이들이 딱히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 않는 점, 결국 백작에게 다시 돌아간 백작부인, 잠시 분열됐다 다시 화해하며 풀리는 갈등 구조 등 갱스터, 마피아 설정을 배경으로만 사용하고 있어 아쉬웠다. 
 

 
시나리오보다는 세트나 조명, 의상 등 주변 요소가 훨씬 돋보였는데 욕실, 콘크리트 지하실, 주차장 등 전체적으로 차가운 배경이 지속되는 가운데 은은한 푸른 조명은 작품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전달해주었다. 조명도 좋았지만 촬영을 누가한 건지 등장인물 죄다 너무너무 예쁘게 찍어 놨다. 보통 한 3막쯤 되면 다들 초췌해지고 땀에 쩐 상태로 그 와중에 앵글은 또 대빵만 하게 잡아줘 안타까울 때가 많은데 여긴 피가로만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뽀송뽀송하고 앵글도 너무 고급지다. 전체 영상 중 어디든 캡처해서 공식 홍보 이미지로 만들어도 될 만큼 앵글과 조명이 정말 고상했다. 막이 전환될 때뿐만 아니라 연출가가 의도한 장면이 전환될 때에도 암전이 상당히 길고 앞 상황과 전혀 다른 장면이 나올 때도 있어 더 영화처럼 느껴졌다. 실공연 때 암전이 저 정도 길이면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데 상당히 분주했을 것 같다.
 
연주도 좋았다. 바로크 스페셜리스트 라파엘 피숑(Raphael Pichon)은 식상한 피가로의 결혼 연주에 많은 변주를 주었는데 본인 오케도 아니고 빈필을 데리고 이런 소박하고 개성있는 연주를 보여준 게 신기했다. 레치타티보나 대사 사이 공백에 연주되는 포르테 피아노 소리도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가수들 이야기도 안할 수 없는데 작년에 파리 가르니에 <피가로의 결혼>에서 저스틴 비버에 빙의했던 레아 데산드레(Lea Desandre)는 전혀 다른 캐릭터성을 가진 케루비노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폭행의 피해자이면서도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미성숙한 소년의 모습, 특히나 눈빛이 인상적이었음. 수잔나로 나온 사비느 드비에일(Sabine Devieilhe)도 다시 봤다. 예전에는 목소리가 더 높고 가늘고 뾰족한 느낌이었는데 더 선명해지고 초롱초롱해졌달까. 아… 소리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는 건 너무 어려워… 음… 소싯적 임선혜랑 비슷해진 것 같음. 바로크 부르는 임선혜만의 또릿또릿하고 찰진 느낌이 있는데 이번 드비에일 목소리가 그렇게 들렸다. 피숑이랑 부부 사이던데 그래서 그런지 반주랑 호흡도 너무 잘 맞았다.
 

 
안드레 슈엔(Andrè Schuen) 무난했다노래는 좋았지만 복잡한 서사를 가진 이번 역할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젊고 멋있었다이번 연출이 인간의 잔인한 본성과 비도덕성을 나타내다 보니 매력적인 슈엔이 오히려 미스 캐스팅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안드레 슈엔 예전에 르네 야콥스랑 같이 한국 와서 돈 조반니할 뻔했는데 ㅠㅋㅋㅋ 중간에 캐스팅이 한번 바뀌어 요하네스 웨이서(Johannes Weisser)가 했었음. 웨이서도 좋았는데 요새 슈엔이 너무 잘나가서 아쉽다.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쿠렌치스, 아르농쿠르 등등 개성 강한 지휘자들이랑 같이 협업했던 것을 보면 실력도 좋지만 성격이 상당히 무난하고 누구랑 붙어도 잘 적응하지 않을까 궁예질을 해본다. 백작 부인인 아드리아나 곤살레스(Adriana González)도 잘했다. 성량이 쩔어서 벨칸토도 잘 어울릴 듯 한데 찾아보니 올해는 투란도트 류를 계속 하더라는… 전반적으로 어두운 역할을 많이 맡는것 같던데 로시니도 잘 어울릴 것 같다. 
 
타이틀 롤인 크리스토프 바칙?(Krzysztof Bączyk, 이렇게 읽는 게 맞나)이 제일 별로 였는데 우선 피가로 역을 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낮아 non più andrai가 되게 답답하게 들렸다. 그와중에 키가 겁나 크고 얼굴도 겁나 커서 ㅋㅋㅋㅋㅋ 무게감은 장난 아님. 이번 공연을 보면서 <피가로의 결혼> 중 잊고 있던 등장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재판관 돈 쿠르지오다. 노래가 없어 평소에 볼 때 그냥 지나가는데 이번 공연에서 쿠르지오가 바텐더로 설정됐다. 대사가 없어도 화면 한구석에 계속 나오고, 3막에서 마르첼리나가 피가로랑 결혼하려는 장면이 등장인물 모두가 바에서 술마시고 마약하는 장면으로 바뀌다보니 바텐더로 설정된 쿠르지오가 더욱 돋보였다. 이때 피가로랑 마르첼리나랑 키스를 하는데 그냥 다들 뽕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로 결론 지은게 아닌가 싶음.
 

 
연주는 좋았는데 워낙 기대했던 연출가라 그런지 상당히 아쉬웠다. <돈 조반니>도 그렇고 <피가로의 결혼>도 그렇고 미투 열풍 이후로 권력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부각시키는 연출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근데 두 작품은 애초부터 모차르트가 그걸 염두하고 권력자를 까려고 만든 작품이라서... 그걸 강조하는게 오히려 식상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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