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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딜레마, 그리고 고뇌

willow77 2021. 3. 8. 00:11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 2021
 
칼 마리아 폰 베버(Karl Maria von Weber)는 독일 오페라사에서 바그너 만큼 중요한 작곡가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선구적인 작품인 베버의 대표작 <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는 사랑과 명예를 위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마탄을 얻은 사냥꾼 막스가 이틀 동안 겪는 고뇌와 슬픔, 막스를 속여 그를 악마에게 넘기고 마탄의 사수로 살아남으려는 카스파의 심리변화, 연인인 막스의 승리를 기원하는 아가테의 사랑을 다룬다. 스토리뿐 아니라 민속적인 선율과 독특한 화음, 극적인 화성 전개, 탁월한 관현악 기법으로 음악적으로도 바그너, 베를리오즈, 슈만을 비롯한 후대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난 2월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극장에서 온라인 무관중 공연으로 <마탄의 사수> 새 프로덕션이 방송됐다.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드미트리 체르니아코프(Dmitri Tcherniakov)가 연출을 맡은 이번 공연은 보헤미안 숲이 아닌 대기업을 배경으로 했다.
 


서곡이 흐르는 동안 연출 속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과 서로의 관계가 무대 위 스크린에 띄워진다. 대기업 오너인 쿠노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자로 몇 년 동안 그의 딸, 아가테와 절연했다가 이번 막스와의 결혼을 앞두고 재회했다. 자신의 바운더리를 벗어나 독립적이 삶을 결정한 딸에게 여전히 화가 난 상태다. 아가테의 약혼자 막스는 쿠노의 회사에서 일하는 매우 야심적인 직원이다. 쿠노의 가장 믿음직한 부하가 돼 회사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길 원한다. 쿠노의 딸 아가테는 아버지의 의견에 관계없이 막스와 결혼하려고 하며 원작에서 아가테의 사촌으로 나오는 엔혠은 여기서 아가테의 둘도 없는 친구로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 아가테가 아버지와 절연하고 나와 살 때 큰 도움을 주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마탄의 사수가 된 카스퍼는 쿠노의 부하이자 군 복무 중 전투 작전에 참여해 PTSD를 앓고 있다는 독특한 설정이 붙었다.
 


작품 속 모든 이야기는 어느 날 오후 1시 빌딩 고층 호텔 스위트룸에서 열린 비즈니스 리셉션에서 시작해 막스와 아가테의 결혼식인 다음 날 오후 12시에 끝난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시계가 나타난다. 무대가 바뀌지 않은 채 한곳에서만 진행되는데 첫 장면인 사냥대회는 다름 아닌 인간사냥으로 뒤바뀌었다. 창가 앞에 설치된 스나이퍼 라이플로 빌딩 아래를 지나다니는 무고한 사람을 무차별로 겨냥해 쏴버리는 시험인 것. 막스는 결국 죄책감에 쏘지 못하고 그런 그를 조롱하며 킬리언이 인간사냥에 성공한다. 무대 위 스크린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나와 원작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꽤나 충격적인 도입부였다. 웃긴 건 나중에 이 테스트가 막스를 위협하기 위해 가짜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총 맞아 쓰러진 사람이 한참 있다 일어나 피를 닦고 말짱해지는 영상이 나오고 웨이터들은 ‘속았네, 속았어’라면서 모든 게 쿠노와 일당들이 작당한 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막스에게 정신분열을 숨긴 채 회사를 다니고 있는 카스파가 접근한다. 마탄을 줄 테니 12시까지 만나자고 하고선 나중에 막스를 시신 마냥 비닐에 둘둘 감은 채 총을 들고 나타난다. <마탄의 사수>에서 가장 유명한, 마탄이 만들어지는 늑대협곡 장면이다. 카스파는 악마 사미엘에게 새 희생자 막스를 데려올 테니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데 이걸 혼자서 사미엘 대사까지 치며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7개의 마탄을 만드는 과정도 미친 채로 여기저기 총을 발사하며 막스를 위협하는 장면으로 뒤바뀌었다. 또라이의 총 놀음에 막스는 정신을 놓고 쓰러지며 늑대협곡 씬이 마무리된다.
 

1인 2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카일 케텔센(Kyle Ketelsen)
등장인물들이 제정신이 아닐 때마다 등장하는 시퍼런 조명


아가테와 엔혠의 관계도 원작과 전혀 다르다. 단독 아리아는 있지만 스토리 상 딱히 큰 비중 없는 원작의 엔혠과 달리 여기서는 아가테가 집을 떠나 있을 당시 큰 도움을 준 주요인물이다. 작품 내내 하늘색 정장을 입고 흐트러지지 않는 머리 스타일을 한 채 나오는 그녀는 사회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듯싶다. 그렇기 때문에 그깟 남자 때문에 독립을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가 결혼하려는 아가테가 탐탁치 않다. 무대 위 스크린에 문자로 아기, 부엌, 교회를 선택한 네가 실망스럽다며 아가테를 계속 갈구는 메시지가 나타나는데 그런 친구의 모습에 아가테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신부 화관 대신 받은 장례식 화관도 엔혠이 일부러 넣어놓은 것 같다. 내내 막스를 질투하는 모습이 연인으로서 좋아하는 건가 싶은 느낌도 들었다.
 

장례식 화관을 보고도 웃고 있는 옌헨


우여곡절 끝에 열린 결혼식. 카스퍼 때문에 정신을 잃었던 것과 달리 막스는 무척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이번에도 열린 사냥대회에서 겨냥하는 인물들은 빌딩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무대 위, 결혼식에 온 사람들이다. 인물 한 명, 한 명을 비추던 막스의 조준경은 아가테에서 멈추고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아가테가 쓰러진다. 그러자 밝았던 무대가 어두워지고 사실 그가 쏜 게 아가테가 아니라 카스퍼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사히 일어나는 아가테와 사람들에게 막스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막스 앞에 수도사가 아닌 그들에게 여태 술을 접대했던 웨이터 중 한 명이 나타나 행복한 결말을 예고한다. 모든 게 다 잘 끝난 줄 안 막스는 웃으며 춤을 추는데 뭔가 슬로우 장면이다. 그 순간 무대의 불이 켜진다. 아가테는 쓰러져있고, 카스퍼는 살아있다. 막스가 쏜 것은 아가테가 맞았고, 불이 꺼진 채 진행된 이후의 상황은 막스의 환영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반전없이 오페라는 그대로 막을 내린다.




<마탄의 사수>는 분명 좋은 작품이지만 많은 다른 오페라처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결말은 플롯의 한계가 분명하다. 아니 작품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던 현자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지맘대로 결혼을 1년 유예하니 마니 해. 오페라의 원작이 된 소설에서도 아가테가 죽으면서 끝나건만; 암튼 이번 <마탄의 사수>는 목표에 집착하다 미쳐버린 막스의 손에 아가테가 죽는 비극적인 결말로 시종일관 한편의 심리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대기업의 행태와 여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인간, 이 같은 한계에 몰리고 몰리다 어느 순간부터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사회에서의 성공 때문에 자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도 짓밟아 버리고, 계속되는 실적 압박 때문에 한계에 몰리다 결국 자살에까지 이르는 현대인들이나 이 <마탄의 사수> 속 막스나 카스퍼와 뭐가 다를까. 거기에 전통주의적인 여성의 가치관과 갈등을 빚고 있는 현대의 페미니즘 문제, 현자를 웨이터로 표현하며 비꼬는 계급주의까지. 천재적인 연출이다.

실제로 이 연출은 100% 무관중 온라인 공연으로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있다. 온라인 공연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을까 싶었던 영상매체의 장점을 적극 이용하면서 라이브로 봤을 때보다 훨씬 직관적이지 않을까 싶게 느껴졌다. 무슨 말이냐면, 초반부터 구구절절 설명되는 상황 설정과 등장인물의 소개를 극장에서 읽다 보면 음악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또 마지막에 아가테가 살아있는 줄 알았다가 불이 켜지자 아가테가 죽고 카스퍼가 살아있는 모습 같은 그런 연출이 되게 영화적이면서도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공연이야 당연히 가서 보면 좋겠지만,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상콘텐츠만의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메트가 그걸 알고 옛날부터 스트리밍 서비스를 했겠지만, 메트는 그런 장치를 이용할 만큼 연출에 대한 고민 자체가 딱히 없어서...
 

&amp;amp;nbsp;나란히 롤 데뷔한 골다 슐츠(Golda Schultz)와 안나 프로하스카(Anna Prohaska)


연출의 설정이 워낙 디테일하고 원작과 완전히 다르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력이 보컬만큼 중요했는데 구멍 하나 없이 다들 잘했다. 그중에서도 카스파 역을 맡은 카일 케텔센(Kyle Ketelsen)이 이번 공연 MVP다. PTSD를 숨기고 있다는 설정이 붙어 시종일관 정신없고 넋 빠진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특히 늑대협곡 장면에서 카스파와 사미엘의 대사를 혼자서 둘 다 쳤다. 연이어 이어지는 대사를 분명하면서도 두 인물이 구분될 수 있도록 금방금방 바뀌는 목소리가 대단했다. 카일 케텔센은 레포렐로로만 봤는데 이런 진지하고 깊은 연기력이 있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연출 말고도 이 공연이 실험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아가테 역의 골다 슐츠(Golda Schultz)와 엔혠 역의 안나 프로하스카(Anna Prohaska)의 롤 데뷔라는 점. 특히 안나 프로하스카는 오페라 풀스테이지를 1년 넘게 하지 않았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를 못 받는 것이 아쉬울 만큼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막스 역 파벨 체르노흐(Pavel Černoch)는 처음 본 테너인데 큰소리로 웃는 장면이 많아서 그런지 노래할 때는 조금 흔들리긴 하더라. 그래도 실력 있는 테너 기근 시국에 본 반가운 가수였다.

이번 공연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에서 3월 15일까지 무료로 상연한다. (→바로가기 : operlive.de/freischue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