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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집착과 중독의 말로

willow77 2023. 5. 22. 00:52

라 모네 극장, 돈 조반니(Don Giovanni), 2014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하는 오페라 중 하나인 <돈 조반니>는 여러 연출가들에 의해 수없이 재해석되어 왔다. 시작하자마자 강간과 살인이라는 막장 범죄가 연달아 터지고, 남녀 간의 사랑과 배신이 얽힌 스토리,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가진 매력, 대사나 행동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아 재해석 여지가 무궁무진한 리브레토 등등 실험적인 연출가라면 한번은 꼭 도전해보고 싶은 요소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마테이가 메트에서 하는 이보 반 호브 프로덕션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에서 오는 차별과 억압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이 역시 2000년대 중반부터 수차례 담아내 왔던 메시지 중 하나이다. <돈 조반니> 연출치고는 이번 이보 반 호브의 프로덕션이 그다지 신박하진 않은 것이다.
 

크쥐시토프 바를리코브스키 (Krzysztof Warlikowski)

 
내가 봤던 돈 조반니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연출은 2014년 벨기에 브뤼셀 왕립 라 모네 극장(La Minnaie De Munt)에서 올린 크쥐시토프 바를리코브스키(Krzysztof Warlikowski)의 프로덕션이다. 그야말로 ‘<돈 조반니>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의 끝. 최근에 다시 봤는데 또 봐도 역시 절레절레… 폴란드 출신의 연극 디렉터 바를리코브스키는 올리는 작품마다 화제를 몰고 다녔는데 <돈 조반니> 이전에 바이에른 국립 극장(Bayerische Staatsoper)에서 <예브게니 오네긴>의 게이 버전…을 올렸었다. 오네긴이 사실은 예전부터 렌스키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신박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납득이 가는 설정… 감독님 비주얼부터가 정말이지 예사롭지가 않다. 쓰는 책마다 불온서적 딱지 맞는 글쟁이처럼 생김.
 
지휘자도 아직 들어오지 않았건만 무대 양옆 박스석 한쪽에는 코멘다토레 부부가(사실 와이프인지 내연녀인지 모름), 그 맞은편에는 안나-옥타비오 커플이 들어온다. 안나와 옥타비오가 꽁냥거리던 중 돈 조반니(이하 돈)와 레포렐로가 그 박스석에 들어오는데 돈을 보자 반가워하며 앵기는 안나의 모습에 빡친 옥타비오는 그대로 나가버린다. 남은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지휘자가 등장하고 서곡이 시작된다.
 

 
서곡이 흐르는 동안 무대 중앙에 영상이 띄워진다. 지하철을 탄 돈은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힐끗거리며 쳐다보는데 나중에 등장할 체를리나이다. 체를리나에게 편지를 건넨 뒤, 거리를 서성거리다 누군가와 한참 통화를 한다. 잠시 후 한 호텔 객실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리자 그가 들어가는데………… 여자 둘과 쓰리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아주 적나라하고 저엉말 장시간 동안… 그 전 장면에서 하던 통화는 콜걸을 구하는 거였고, 이 연출에서 돈은 지독한 섹스 중독자인 것이다.
 
영상 시작할 때 지하철에서 여자를 훔쳐보는 장면에서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었으니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의 2011년 작 <셰임(Shame)>이다. 셰임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지하철 씬은 등장인물의 심리 변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중요한 장면인데 아니나 다를까 찾아보니 감독이 직접 셰임에서 영감 받았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했더라.
 
눈 여겨볼 점은 저 오프닝의 쓰리썸씬이 그냥저냥 흉내만 내며 넘어간 수준이 아니라는 것… 가수가 대역없이 직접 다 소화했고, 등장하는 여자들은 위 아래가 모두 나온다. 셰임 마지막에 나오는 쓰리썸씬의 수위보다 절대 덜하지 않다. 그 장면 다음엔 자기 위로 장면도 나옴… 프랑스 바리톤 장 세바스티앙 보(Jean-Sébastien Bou)가 타이틀롤을 맡았는데 인지도 작은 가수도 아니고, 나름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르던 분이 직접 소화했다니 할말을 잃었다. 하지만 덕분에 돈의 캐릭터성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음.
 

 
영상 속 돈은 분명 정상이 아니지만, 그만큼 더 또라이 같은 인물이 하나 더 있었으니 돈나 안나였다. 원작과 다르게 서곡 내내 돈을 유혹하고 레포렐로의 푸념 이후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면서 클러치 백에서 총을 꺼내 그를 겨눈다. 그러나 쏘지 못하고 키스를 하던 중 코멘다토레가 들어오고 돈은 안나에게서 뺏은 총으로 그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돈과 레포렐로 퇴장 후 빡쳐서 나갔던 옥타비오가 돌아오고 상심하는(건지 척인지 모르겠는) 안나를 위로해주는데…….
 
안나는 이내 옥타비오에게 달려들더니 바지를 벗기고 또 19금 장면이 나온다. 변태적인 동시에 그럴싸 했던 게 연출이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안나랑 옥타비오랑 처음 부르는 이중창 마지막 부분이 신음소리랑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저 연출보고 나서 한동안 그 노래 들을 때마다 자꾸 신음소리처럼 들리는 음란마귀가 씌임….ㅋㅋㅋㅋ 그 와중에 아까 나간 돈은 알몸으로 무대 위를 비틀거리다가 이내 쓰러진다. 레포렐로와 수하들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 속옷부터 차근차근 옷을 입혀 준다. 시작한지 20분 정도 됐건만 적나라한 두 번의 섹스씬과 두 번의 나체가 등장했다…
 

 
정신을 차린 돈 앞에 엘비라가 나타난다. 돈을 만난 엘비라는 달려들어 또! 키스를 하고 돈 역시 마구 퍼붓는데..… 그 장면도 진짜 ‘윽’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적나라하고 불쾌함. 레포렐로의 카탈로그 아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성이 웹캠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셰임이 생각났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셰임에서 영감받은 것 치고는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진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현대인의 공허함, 그럴 듯해보이지만, 빈 껍데기만 있는 위선적인 삶이라는 셰임의 메시지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면 볼수록 돈은 그냥 개변태 같고 등장인물 모두 미친 사람처럼 느껴짐ㅠㅠㅋㅋㅋㅋㅋㅋㅋ. 체를리나와의 아리아에서는 돈이 발 페티시라는 설정이 더해지는데 엘비라의 발을 핥는, 또 한 번의 ‘윽’ 장면이 등장한다…. 아 진짜 불쾌하고 인상 찌푸려지는데 다음 장면이 넘나 궁금한…. 감독님이 원한 게 이런 결의 위선이라면 정말 성공하셨습니다….
 

 
1막 파티 장면은 지금까지 적립한 불쾌감을 한 번에 터뜨리는 듯 여자들은 거의 속옷차림, 남자들도 상반신 탈의로 등장한다. 그리고 무대 중앙에 웬 검은칠한 여성이 팬티만 입고 끝없이 춤을 추는데 진짜 기괴했다. 분명 속옷만 입었는데 하나도 야하지 않고 1막 피날레 합창이 끝난 후에도 한참이나 헐떡거린다. 이 분은 2막 파이널에서 웨딩 드레스를 입고 다시 등장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커튼콜 때도 등장인물들과 함께 인사할 만큼 중요한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2막 시작 전 또 한번 영상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애니메이션이다. 찾아보니 1920년대 실제로 나왔던 만화라는데 한껏 부풀은 소중이를 든 남성이 여성을 찾아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내용. 관객들 웃음이 터지는데 어이없음+실소처럼 들림 ㅋㅋㅋㅋ…. 영상이 끝나고 1막 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는 돈이 링거를 꼽고 술을 마시며 등장한다. 돈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엘비라는 자기 여시종과 연인 관계를 맺고있는 듯하다. 돈의 세레나데 부분에선 시작할 때부터 등장인물 사이를 맴돌던 줄넘기하는 소녀가 나타난다. 리뷰를 찾아보니 돈한테 아직 정복당하지 않은 순수한 여성을 의미한다는 의견도 있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적인 순결함을 나타낸다는 의견도 있었다.
 

 
석상 초대 장면은 극이 처음 시작됐던 박스석에서 이뤄진다. 돈과 레포렐로 그리고 코멘다토레 인형이 자리하고 맞은편에 진짜 코멘다토레가 나타나 노래를 이어간다. 영상을 정말 적절하게 활용했는데 박스석 장면이 나올 때마다 해당 상황을 무대 위 스크린에 계속 쏴 줘서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2막 피날레 저녁식사 씬 역시 불쾌감은 계속된다. 잘 차려진 음식을 먹는 평소와 다르게 생고기를 잘라 씹어먹는 돈이 등장하는데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중 하나인 식욕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초기 인류 역시 짐승을 사냥해 조리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먹었으니까. 동시에 약육강식 사회에서 포식자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피날레 장면 처음부터 무대 위에는 KKK단이 쓸 법한 하얀 고깔모자를 쓴 인물이 자리하는데 나중에 보니 코멘다토레였다. 이 장면 때문에 코멘다토레를 굳이 흑인으로 캐스팅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음. 근데 또 이 흑인 베이스 가수 성이 화이트(Willard White)라는 게 의외의 개그 요소…ㅋㅋ 회개하지 않겠다며 코멘다토레의 손을 잡은 돈은 스스로 목을 베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커튼콜 시작하길래 이렇게 끝나나 했는데…. 등장인물들이 다시 의자에 앉더니 마지막 합창을 부르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흑인 댄서는 뒤로 돌아가 누워있는 돈의 셔츠를 벗기고 그를 안는다. 그리고 합창이 끝나기 바로 직전, 안나는 총으로 옥타비오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이 연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평소 공기 같던 안나-옥타비오 커플이 돈 못지 않게 중요한 서사를 지녔다는 점이다. 제일 노잼 커플인 두 사람이 이렇게 돋보이는 연출은 처음. 안나는 레알 또라이같고 옥타비오는 히스테릭함이 가득하다. 옥타비오는 안나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절대 자신만을 사랑하지 않으며, 돈만큼이나 이성을 유혹하길 좋아하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 그러나 그녀를 향한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르겠는 감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끊임없이 나락으로 모는 안나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다. 결국 옥타비오를 포함해 코멘다토레와 돈까지 안나 주변의 모든 남성은 죽음을 맞이한다.
 

 
이 공연에서 안나는 캐나다 소프라노 바바라 해니건(Barbara Hannigan), 옥타비오는 핀란드 테너 토피 레티푸(Topi Lehtipuu)가 맡았는데, 바바라 해니건은 전작이었던 <룰루(Lulu)>에서도 그렇고 워낙 또라이 같은 연기를 많이 했는데, 토피 레티푸는 의외의 발견이었다. 큰 키와 잘생긴 외모에 거지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서 자기는 그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안나에게 끊임없이 휘둘리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특유의 미성도 정말 돋보였는데, 당시 리뷰에서는 계속 덜컹거린다고 까였었음. 바바라 해니건 역시 뛰어난 가수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2막 후반 아리아 Non mi dir는 쩔었다. 왜냐하면 노래 부르던 상황이 옥타비오가 밑에서 유사 성행위를 하고 아리아 내내 누워서 불렀기 때문… 그 노래가 얼마나 높은디ㄷㄷㄷ…. 오죽했으면 이 공연에서 박수가 단 한차례 나왔는데 Non mi dir 이후였다. 청중들이 벙찐건지 빡친건지 정말 이외에는 박수가 한번도 안나오고, 1막 끝나고는 야유도 들리고 커튼콜 때도 몇 사람 안 친 것처럼 들림.
 
논란의 연출인 만큼 당시 매회 매진을 기록했지만 공연 자체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특히나 무대 위에 너무 많은 요소들이 등장하다 보니 실 공연에서는 그게 상당히 번잡스럽게 느껴진 모양. 리뷰를 보니 하나의 씬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각기 다른 인물들의 상황이 펼쳐져 관객이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영상에서는 크게 못 느꼈지만, 동선이 워낙 복잡해 가수들 노래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나 보더라.
 
그리고 이후 이 프로덕션은 2014년 처음 올리고 나서 단 한 차례도 리바이벌 되지 못하고 묻힌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연출가가 논란은 많았지만, <예브게니 오네긴>이랑 <살로메>는 첫공 이후 계속 리바이벌 됐고 다른 공연들도 흥했는데 모차르트의 사골 오브 사골 오페라인 <돈 조반니>가 이 이후로 무대 위에 한번도 올라가지 못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이해가 갑니다. 진짜 가수들 전부 스스로를 내려놓고 연기해야 하는데 누가 과연… 마테이가 저 역할 한다 그러면 소속사에 폭탄 메일 보내서 말렸을 것 같다….. 물론 하지도 않겠지만. 마테이는 키스씬 하나도 정말 어색하고 못하는 게 보여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저런 연기는 불가능해 ㅠㅠ큐ㅠㅠ큐ㅠㅠㅠㅠㅠ. 이외에도 도입부에 영상도 찍어야 되고 코멘다토레 인형도 만들어야 되고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드는 점도 문제일 듯 싶다.
 

잘생김+얼굴에 저는 북유럽 사람입니다라고 써있는 토피 레티푸(Topi Lehtipuu)

 
타이틀 롤인 장 세바스티앙 보는 불쾌감 때문인지 커튼콜 때 박수를 많이 못 받았지만 연기도 노래도 정말 잘했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오페라 가수는 극한직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낌. 토피 레티푸는 얼굴만 알고 자세히 본 게 이 공연이 처음이었는데 외모만큼 목소리도 너무 예뻤다. 바로크 전문가 답게 성량이 크진 않지만 반 가성처럼 들리는 미성이 정말 감미로웠다. 왜 노래로 까는지 정말 모르겠네. 이 공연 보고 레티푸한테 한동안 빠져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봤는데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자국에서 열리는 헬싱키 페스티벌 음악감독을 역임했고 현재는 자국 바로크 오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51세라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동안인 듯. 하... 진짜 가장 아쉬운 게 맘에 드는 가수 발견했는데 지금은 활동 안 할때다ㅠ. 내가 모르는 멋진 가수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전체적으로 불쾌했지만 재미있게 봤다. 특히나 미투 운동 이후 여성을 일방적인 피해자로 설정하는 연출들이 많은데 극 중 안나처럼 피해자가 아닌 동등한 포식자로서 여성을 그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페미니즘 시각이 들어간, 시대를 앞서간 연출이 아닌가 싶다.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는데 수위 때문인지 논란 때문인지 오페라 OTT인 Cue TV말고는 전편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음.
 
https://www.cuetv.online/videos/opera-don-giovanni-w-a-mozart-la-monnaie-de-munt-2014-don-giovan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