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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올라온 클래식계 미투 운동

willow77 2022. 2. 13. 02:03

파리 국립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2022
 
2017년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 추문 스캔들로 성폭력 피해 고발 운동 ‘미투’가 촉발된 가운데 그 파문이 클래식 음악계로 번졌다. 2017년 말, 40년간 메트 오페라를 이끌던 제임스 레바인이 메트에 부임하기 한참 전부터 제자들을 성추행했고 그 범죄가 메트에서도 이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잇달아 샤를 뒤투아, 다니엘레 가티 등 지휘자들에게 당했다는 소프라노들이 이름과 얼굴을 걸고 피해를 증언했다.

그리고 2019년,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전향해 칠순 넘은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 살아있는 전설 플라시도 도밍고의 성폭력 의혹이 터졌다. 신인 소프라노들을 상대로 성공하게 해주겠다며 회유한 뒤, 성추행,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것. 무려 30명 넘는 성악가, 무용수, 음악가, 스태프 등이 지난 30년간 도밍고가 저지른 부적절한 행위를 경험했거나 목격했다고 고발했고 현직, 은퇴한 소프라노들의 증언도 다수 이어졌다. 지휘자는 물론 연출자, 음악감독까지 씹어먹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던 도밍고는 좁디좁은 오페라 바닥에서 어린 소프라노들의 꿈을 담보로 성폭력을 저지르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떠들썩했던 이 사건은 상당히 빠른 시간 만에 묻히기 시작했다. 건강이 안 좋았던 레바인은 조용히 세상을 마감할 거란 예상과 달리 죽기 얼마 전까지 공연이 잡혀있던 상태였고, 다니엘레 가티도 사건 직후 상임지휘자로 있던 로열 콘체르트 허바우에서는 내려왔지만, 얼마 뒤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샤를 뒤투아도 마찬가지. 도밍고 역시 메트같은 큰 극장에 서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겠지만, 커리어는 여전히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 클래식계에 뿌리박은 권력자들의 힘은 생각했던 것보다 막강했다.
 


이번 파리 가르니에에서 올린 <피가로의 결혼>은 클래식계를 뜨겁게 달구다 짜게 식은 2010년대 후반 미투 열풍과 클래식계에 만연한 성폭력을 다시 상기하게 해주었다. 영국 출신 네티아 존스(Netia Jones)가 연출한 이번 <피가로의 결혼> 속 배경은 다름 아닌 파리 오페라 극장이다. 피가로는 극장의 가발, 소품 담당, 수잔나는 의상 담당, 바르바리나는 무용수, 바르톨로와 마리첼리나는 다음 쇼 제작 계약을 위해 극장을 찾은 제작자와 감독, 백작부인은 쇼의 주연 소프라노 그리고 알마비바는 잘나가는 극장 메인 가수다.

서곡이 흐르는 동안 쇼를 준비하는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곤 세 대기실에 각각 백작부인, 피가로와 수잔나, 알마비바 백작이 다음 쇼 준비를 위해 자리한 가운데 알마비바 대기실에는 어린 무용수가 함께 앉아있다. 수잔나와 피가로의 대화 후 피가로의 첫 번째 아리아가 흐르는 동안 알마비바는 무용수와 함께 안무를 맞춰본다. 난감해하는 무용수를 데리고 춤을 추면서 이 오페라의 배경과 설정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원작 속 ‘결혼’은 ‘성범죄 없는 극장을 바라는 염원’으로 해석된다. 1막에서 피가로가 수잔나와의 결혼을 조르기 위해 동원하는 합창단은 성범죄를 규탄하는 시위단으로 바뀌었다. <피가로의 결혼> 원작에서 하인이 결혼할 경우 결혼 전 신부의 첫날 밤을 강제로 영주에게 바쳐야 하는, 그 역시 위력에 의한 성범죄인 ‘초야권’이 작품 내 중요한 요소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적절한 재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알마비바는 리허설 스튜디오, 의상실 등 장소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무용수들을 음흉한 눈길로 바라보며 희롱한다. 그리고 결국 3막 마지막에 무용수 바르바리나를 자기 대기실로 데려가고 잠시 후, 바르바리나는 울면서 옷핀 찾는 아리아를 부르며 마르첼리나에게 호소한다. 피가로가 준 옷핀을 잃어버렸다고 노래하지만, 가사 속에서 옷핀은 권력자에 의해 유린당하고 잃어버린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읽혔다. 수잔나로 변한 백작부인에게도 찝쩍대다 걸린 알마비바는 자신의 바람기를 진정성 제로인 상태로 사과하지만, 쇼 제작을 위해 극장을 방문한 마르첼리나는 알마비바의 계약을 파기하며 오페라가 마무리된다.
 


오페라계에서의 성범죄는 실제로 의상실이나 리허설 스튜디오, 또는 창문 없는 연습실처럼 1대1 교습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연기나 노래를 지도하겠다며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하고 그게 성추행, 성범죄로 이어지는 것.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게 진짜로 연기를 위해 하는 일이라면 정색하고 화낼 경우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니 대처하지 못하다가 통제할 수 없는 선까지 가버리는 것이다. 네티아 존스는 스테이지 전체를 가르니에 극장으로 설정하고 대기실, 객석, 연습실을 파리 극장과 완전 똑같이 만들면서 지금 이 같은 알마비바의 범죄가 관객들이 마주하고 있는 오페라 극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임을 나타냈다.

연출가 인터뷰를 보고 피씨스러운 연출일거라고는 예상했는데 의외로 거부감 없이 즐겁게 봤다. 알마비바의 바람기를 여성에 대한 학대, 백작부인과 수잔나의 연대를 페미니즘 시각 속에서 해석한 연출은 자주 봤는데 그걸 노골적이게 오페라 극장으로 설정하고, 최근 벌어졌던 클래식계 미투로 엮은 것은 굉장히 신선했다.


그러나 연주는 정말 아쉬웠다. 수잔나, 타이틀롤 맡은 잉 팡과 피사로니는 좋았지만 백작부인인 마리아 벵트손은 너어무 별로였다. 노래 부르는 게 무척 힘들어보였고 그러다보니 연기를 제대로 할 만한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감미롭게 불러야 할 아리아는 힘을 빡주고 합창 때도 혼자 딸리니 조화로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아 페르손과 더블 캐스트였는데 방송을 미아 페르손 버전으로 봤으면 훨씬 좋았을 걸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두다멜... 점점 하향세인 것인지 연주가 너무 별로다ㅜ 2015년 린덴 극장에서 올렸던 <피가로의 결혼> 때도 별로였는데 이번이 그 별로를 갱신했다. 연주라고 하기에도 뭐한 게 그냥 감흥이 제로다. 안 그래도 사골인 오페라에 개성은 말살됐고 강약 조절, 빠르기조차 올드하기 그지없는, 그냥 반주였다. 그리고 연습이 부족한 것인지 가수들끼리 합창도 쒯이었다. 삼중창만 넘어가면 하나도 안 맞고 엉망진창. 나름 한다는 가수들 모아놓고 이렇게 뽑아내는 것도 지휘자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이 연출에서 메인은 역시나 알마비바다. 모든 일의 근원이자, 현재도 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대변하는 역할이기에 연출 자체를 알마비바에 맞췄고, 원래 그 주인공은 피터 마테이였다. 근데 방송 전주에 몸 상태가 안 좋아 커버가 선다는 뉴스가 나오더니 방송 날을 포함해 이틀을 크리스토퍼 말트먼이 커버를 섰다. 망할! 악!
 


말트먼은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근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근육질이던 몸이 포동포동해졌고, 그에 비례해 소리가 굉장히 깊어졌다. 그동안 2008년 잘츠부르크 <돈 조반니>와 마테이가 2007년 했던 같은 연출의 메트 <세비야의 이발사>를 보면서 저렇게 얕고 가볍고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가 무슨 바리톤을 하냐며 깠다. (나만 깐게 아니라 메트 <세비야의 이발사> 속 피가로 아리아 클립에 마테이 데려오라며 온갖 악플이 다 달려있다) 최근에는 <리골레토>를 한다길래 뭔 배짱이지 싶었는데 살이 찌면서 목과 흉통에도 살이 찐 건지 소리가 크고 깊어졌다. 그러나 말트먼 목소리는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다ㅠ,.ㅠ

마테이가 했으면 어땠을까 너무 아쉽다 ㅠ. 노래는 그럭저럭했지만 말트먼 연기가 너무 별로였기 때문이다. 급하게 커버 선 티가 날 만큼 연기가 별로였고, 말트먼 특유의 노래 부를 때 입이 비뚤어지는 모습이 너무나 거슬렸다... 이 연출이 대체 누구한테 초점을 맞춘 건가 한참을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마르첼리나가 알마비바를 향해 계약서를 찢을 때 돼서야 알마비바한테 맞췄구나 깨달았다. 그 정도로 말트먼은 ‘여성들을 상대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휘두르고 다니는 개새끼 오페라 가수’ 역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반면 마테이는 일전에 미하엘 헤네케가 연출한 <돈 조반니>에서도 그 역할을 맡았기에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본인 업계에서 벌어진 흑역사를 어떤 심정으로 연기했는지도 궁금하다. 작년부터 기다리던 공연이었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 버전으로 보게 돼 너무 아쉽다 ㅠ. 딱 이틀만 커버세우고 다음부터 나온걸 보니 몸상태는 회복이 된 거 같은데... 마테이 버전으로 영상물 출시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