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국제오페라축제, 돈 조반니 221007

영상물이나 음반이나 이태리 가수들은 맨 나왔던 사람들이 나오길래 가수 풀이 좁나 싶었다. 그게 아니라 내수 시장이 워낙 탄탄하다 보니 굳이 유럽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던 거. 국내에서 <돈 조반니> 봤을 때도 만족스러운 공연이 대다수였는데 이탈리아 페라라 극장에서 내한 온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 <돈 조반니>는 ‘아! 이런 게 바로 종주국 위상이구나’ 싶을 만큼 정말 잘했고 꼭 현지에 가서 오페라를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해주었음.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는 ‘국제’라는 타이틀이 달린 만큼 해마다 연출을 비롯한 현지 캐스트를 그대로 가져와 상연한다. 우리나라도 노래 잘하는 가수들 쎄고 쎘는데 굳이 왜 해외 캐스트를 데리고 와서 돈지랄인가 싶었는데, 보니까 페라라 극장 혼자 만든 게 아니라 대구랑 합작한 프로덕션이었다. 또 페라라 극장이 내한 온 만큼 대구에서 만든 <투란도트>를 조만간 현지에서 상연할 계획이라고. 그냥 막연히 사오는 게 아니라 교류의 개념인 것. 올해 페스티벌의 가장 큰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만하임 극장에서 내한 온 바그너의 반지 4부작이겠지만, 바그너 1도 모르니 필요없고 <돈 조반니>만 진작에 예매해 보고 왔다. 페라라 시립 극장은 이탈리아에서 5성급 극장은 아니지만, 나름 로시니 작품이 초연된 적도 있고 클라우디오 아바도도 종종 갔던 극장임. 불과 지난 7월에 올렸던 프로덕션을 상연했는데 연출의 기대가 바닥인 상태에서 봐서 그런지 무척 만족스러웠다.
배경은 20세기 초 한 마을에 머물게 된 유랑 서커스단. 돈 조반니는 호랑이 조련사, 레포렐로는 광대, 돈나 안나는 곡예사, 엘비라는 공중그네 아티스트, 옥타비오는 회계사, 기사장은 유랑단 CEO 혹은 관리자, 체를리나랑 마제토는 극단의 허드렛일을 하는 근로자이다. 연출가 노트를 보니 <돈 조반니>가 서커스랑 굉장히 잘 어울리는 오페라라고 하는데 크게 공감은 되지 않는다. 그것보단 귀족이 아닌 직업을 가진 등장인물들의 모습,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유랑 서커스단이라는 설정,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연출 내용이 <돈 조반니>를 특별한 사람이 아닌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로버트 카슨이 했던 연출이랑 비슷한 듯.


서커스단이라는 연출보다 더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관객과의 거리가 아예 없는 듯한, 무슨 마당극처럼 진행된 점이다. 막도 아예 없애서 30분 전부터 서커스단이 공연을 준비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레포렐로는 무대 위를 돌아다니며 관객들과 인사도 하고 공연 시설도 점검한다. 특히 ‘박수’, ‘지휘자’, ‘휴식’ 같은 한글이 적힌 팻말을 들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공연 시작 전에는 사진 촬영도 자유로워 포즈를 잡아주기도 했다. 공연장 밖 로비에서는 서커스단 근로자들이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와서 쓸고 닦고, 한쪽에선 현악 4중주단이 의상까지 갖춰 입은 채 <돈 조반니> 속 음악을 연주했다. 본 공연의 기대를 높여주니 좋긴 했는데 정말 개어수선했음 ㅋㅋㅋㅋㅋㅋ 나도 그 현악 4중주단 공연을 보면서 동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발에 뭐가 걸리적거려서 봤더니 무용수 한 분이 바닥을 닦고 계셨다... 이 퍼포먼스는 공연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일련의 과정은 공연 속 공연이라는 설정을 충실히 하기 위한 연출의 일부였던 것 같다.
지휘자는 무슨 <위대한 쇼맨> 속 휴 잭맨 옷을 입고 무대에서 등장했다. 빨간 코트를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서곡이 시작됐다.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무대 위에서는 여성 무용수의 공중 곡예 쇼가 이뤄지는데 고난이도 동작이 나올 때마다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돈 조반니> 서곡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어수선하게 느껴졌지만, 이날 가수들에 비해 오케스트라가 정말 쒯이었어서 안 들리니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공연 내내 관객이 극의 일부로 계속 참여했다. 특히 돈 조반니는 무대 이곳저곳을 오가며 관객들을 유혹하고 세레나데 부를 때는 아예 한 분을 일으켜 세워서 불러줬다. 마제토가 돈 조반니를 잡으려고 객석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레포렐로와 돈 조반니도 무대를 벗어나 관객석 한가운데서 레치타티보를 부른다. 앞자리 사람들한테만 그러는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다 공연에 참여시키면서 유쾌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다만 이 진행방식이 까칠한 이탈리아 관객들한테도 이뤄지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음.
극에 관객들이 참여하면서 웃음소리도 계속되고 조명도 여러 번 켜지길 반복하면서 어수선한 동시에 <돈 조반니> 속 진지함은 다 사라졌다. 그나마 진지했던 옥타비오도 ‘dalla sua pace’ 부를 때는 괜찮았는데 2막의 ‘il mio tesoro’때는 무슨 찰리 채플린에 빙의한 것처럼 어설픈 코믹 연기를 해서 뒷부분의 진지함이 다 부숴졌다... 돈 조반니 역시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기사장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꼬시려던 공중 곡예 아티스트 여성을 자기 트레일러로 데리고 가면서 마무리 된다. 마지막 돈 조반니 빼고 부르는 합창 없이 바로 끝났다. <돈 조반니>는 부파와 세리아 성격이 모두 담겨있고 주인공을 비롯한 사람이 죽는 장면도 있어 심각하고 진지한, 때론 슬프기도 한 오페라인데 그런 면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아 아쉬웠다.
근데 노래는 개쩔었음. 다른 사람들도 좋았지만, 가장 돋보인 것은 타이틀 롤을 맡은 바리톤 조반니 루카 파일라(Giovanni Luca Failla)와 옥타비오 역의 테너 로렌초 마르텔리(Lorenzo Martelli)다. 이 두 사람을 비롯해 모든 캐스트가 35세 미만인데 페라라 극장은 젊고 재능있는 아티스트 발굴을 위해 공개 오디션을 열고 거기에 참가한 300명 중 이번 캐스트가 결정됐다. 더 놀라운 건 조반니 루카 파일라는 지난 7월에 페라라 극장에서 했던 이 프로덕션의 <돈 조반니>가 롤 데뷔였고, 로렌초 마르텔리는 꼴랑 24살밖에 되지 않은 꼬꼬마란 점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 다 노래가 귀에 때려 박혔다. 박수도 제일 많이 받았고. 특히나 루카 파일라는 노래도 노랜데 돈 조반니 역할을 심도있게 연구했는지 연기 면에서도 어색함이 하나도 없었다. 첫날 공연을 유튜브 생중계해서 영상이 남아있는데 영상으로는 두 사람의 노래 퀄리티를 담아내지 못함. 현장 가서 들으면 딱 튀는 게 바로 느껴진다. 흔하디 흔한 돈 조반니 소리를 너무도 깔끔하고 박력있게 담아냈고, 옥타비오의 쌉노잼 아리아 두 개 모두 끝나지 말길 바랄 만큼 정말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리고 현지 발음이라 그런지 레치타티보 할 때도 또렷하고 쫀득쫀득한 느낌이 들었음. 다른 가수들도 나쁘진 않았지만, 엘비라는 저음이 약하고 체를리나는 목소리 자체가 역할에 어울리지 않아 아쉬웠다.
여기서 아쉬움을 넘어 정말 별로였던 것은 연주...... 지휘자를 현지에서 데려왔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만큼 너무 못했다ㅠ 호른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소리를 낸 적이 없는 것 같고 목관, 금관, 현 할 것 없이 골고루 말아먹었다. ^_ㅜ 진짜 민망한 수준이었음...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는 2015년엔가 <마술피리>할 때 보고 두 번째였다. 그때는 완전 천당석 끝자리에 앉았고, 이번에는 앞에서 세 번째 왼쪽 끝에 앉았는데 어째 천당석에 앉았을 때가 더 소리가 잘 들렸던 것 같다. 가수들이 뒤만 돌면 목소리가 울렸고 그러다 보니 합창이 조화롭게 들리지 않았음. R석 예매했는데 공연이 너무 좋아 VIP석 갈 걸 후회했다.
공연 시작 전, 로비에 있는 기념품샵에 갔는데 내 앞에 눈 크고 키 큰 외국인이 기념품을 사고 있었다. 마스크 쓰고 있어서 잘 안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까 타이틀롤 가수였음. 분장한 채로 이것저것 현금 주고 사 갔는데, 이역마리 건너온 가수들한테 이걸 돈 주고 파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념될 수 있도록 굿즈 패키지 만들어서 하나씩 선물하면 한국을 추억할 수 있을텐데. 또, 대구오페라극장은 환경보호를 명분으로 이번 페스티벌 공연 프로그램북을 100개만 제작해 선착순으로 판매했는데 그것도 이해가 안 간다. 공연가서 굳이 돈 주고 프로그램북 사는 사람들이 그걸 함부로 버릴 것도 아니고, 공연 본 것 추억하고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져가는 건데 그걸 인터넷으로 보라고? 돈을 참 이상하게 쓰는 기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접한 프로그램북 2천 원에 팔지 말고 연출 히스토리나 가수들 인터뷰도 넣어서 좀 빠방하게 구성해 8천 원, 만 원에 파는 게 오히려 이득일 것 같은데 그런 소소한 점들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앞으로 대구 국제 오페라 축제에 계속 갈 것 같다.